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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신경림 ‘길’

2024-05-27     차형석 기자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 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면 비로소 겸허해져

▲ 송은숙 시인

가끔 귀퉁이가 접힌 채 재단된 책을 본다. 접힌 곳을 펼치면 책의 모서리에 밖으로 향한 화살표 모양이 생긴다. 종이를 접으면 화살표는 다시 안으로 향한다. 책의 내부를 향하는, 의표를 찌르는듯한 저 서늘함.

접힌 책의 화살표가 이 시의 ‘길’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화살표는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라는 안내 표지의 역할을 하지만, 그것은 종종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 길이 이끄는 대로 갔다가 길을 잃는 셈이다.

반대로 접힌 화살표가 내부로 향하는 길이라면, 화살표가 어느 글자를 가리키는지 곰곰 살펴보듯 길이 이끄는 내면의 모습을 골똘히 들여다볼 것이다. 이때 길은 나를 나에게로 이끄는,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그래서 비로소 겸허하게 만드는 그런 길일 것이다.

지난 5월22일에 신경림 시인이 세상을 뜨셨다. 길이 이끄는 대로, 길을 따라가셨다. ‘낙타’란 시에서 떠날 때는 “낙타를 타고 가리라” 하셨으니, 저 아득한 길을 그러나 낙타와 함께 외롭지 않게 가셨을 것이다. 그 길에 꽃향기 더해지고 그늘 시원하게 드리웠기를.

송은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