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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성제의 독서공방](28)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 오래오래 보고 난 뒤

2024-05-27     경상일보
▲ 설성제 수필가

베란다 창 앞에 선 나무를 마주한다. 하필이면 사철 변함없이 푸르기만 한 스트로브잣나무다. 내가 어떠한 수고도 주지 않기에 좋고 싫고를 말할 자격이 없어 무심히 바라보며 지내온 세월이 십여 년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스트로브잣나무의 품속이 참새들로 부산스럽기도 하고, 가지 끝에 가을 새가 고즈넉이 앉았다 가기도 한다. 몇 년 전부터는 봄이면 기린 뿔 모양의 연둣빛 새순이 뻗어 나와 마치 어린 기린들이 한데 모여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 올해는 새순이 미끈하게 일자로 돋아나왔을 뿐인데, 문제는 내가 밖에서 일하는 중에도 이 스트로브잣나무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고서는 마음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하여, 어느 하루는 종일 집에 머물며 스토로브 잣나무를 사랑했다.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안인희 옮김·창비)은 나의 스트로브잣나무를 향한 가벼운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나무들에 대한 사랑, 철학, 역사, 사유, 말로 다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그리움이 담긴 18편의 에세이와 21편의 시로 엮여 있다.

헤세는 나무의 입을 빌어 말한다. 나무는 영원한 생명의 생명이라고, 영원성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이 나무의 직분이라고, 나무의 힘은 믿음이라고, 나무의 의무는 거룩함이라고.

특별히 거인 여름함박꽃나무와 난쟁이 실측백나무의 대립적인 모습에서 낙관론과 비관론의 대립을 보여주는데, 1차 세계대전으로 휘몰려가던 낙관론자들이 갑자기 붕괴해 버림에 대해서 말함으로 비관론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된다.

헤세의 눈과 마음으로 나무를 보고 냄새를 맡고 나무의 이야기를 듣는 책. 나의 관점을 넘어서서 대문호의 시선과 사유를 빌어서 본다는 것이, 자연과 세상을 조금씩 그리고 좀 더 나의 것으로 끌어당길 수 있음이, 향유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헤세가 나의 스트로브잣나무를 만난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지 그려본다. 설성제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