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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의 건축과 여행 그리고 문화(93)]알 함브라(1): 음악으로 듣는 전설

기타의 선율로 유명한 알함브라 13세기 마지막 이슬람왕조 요람 알 카사르 요새 구역·나스르 궁전 별궁 헤네랄리페 등 3개 영역 구분 기하학적 원예담긴 파티오정원 등 서로 다른 용도와 양식·정원 결합 은밀하고 다양한 공간적 경험 선사 이슬람 건축 문명의 절정으로 꼽혀

2024-06-14     경상일보
▲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

인간의 복잡미묘한 서정을 표현하는데 음악만큼 강력한 것이 있을까. 그라나다로 향하는 차창에서 풍경은 보이지 않고, 기타의 선율 하나가 머릿속을 맴돈다. 그 유명한 타레가(F. Tarrega)의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 (Recuerdos de la Alhambra)’, 화려한 기타의 트레뮬로 선율이 슬며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면서 낯선 전설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 환상적인 충동에 못 이겨 기어이 비싼 클래식 기타를 사고 말았던 젊은 날의 내 모습도 중첩된다.

멀리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설봉이 나타나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산맥에서 뻗어 내린 사비카 언덕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성채, 바로 알함브라다. 수 십년간 가슴 깊은 곳에 몰래 간직해 왔던 첫사랑의 연인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흥분이다. 요새라고 하기에는 작은 시골 마을의 영주 성만큼이나 소박하다. 다소곳하면서도 단정하며,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아련하면서 우수에 젖은 모습이다. 언덕 정상을 차지하면서도 결코 위압적이거나 거창하지 않게 살포시 내려앉았다.

알함브라의 슬픈 역사는 이베리아 이슬람 왕조의 성쇠와 닿아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지막 이슬람 왕조였던 13세기 나스르 왕조(Nasrid)시대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군에 밀려 이베리아 남부로 쪼그라든 이슬람 세력은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토후국(Emirate of Granada)을 세우고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15세기까지 그라나다는 이슬람 문명의 최후를 장식하는 보루였다. 온갖 풍상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피워낸 꽃처럼 이슬람 건축 문명의 절정을 이곳에 남긴 것이다.

▲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지막 이슬람 왕조였던 13세기 나스르 왕조(Nasrid)시대의 작품인 알함브라 원경.

알함브라는 나지막한 언덕 정상부에 좁고 긴 타원형 대지를 깔고 앉았다. 비록 높고 험악한 지형은 아니지만 주변에 계곡이 형성되어 자연 해자가 되었고, 평원을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는 광활한 시계를 가지고 있었다. 원래 방어기지로서 요새가 있었던 이곳에 성채와 왕궁을 지었고 언덕 아래에 있는 도시를 살피도록 한 것이다. 산정은 방어하기에는 좋지만 물 공급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아 도시를 이루기에 적합한 조건이 아니다. 무어인들은 로마인들의 수로 건설기술을 응용했다. 6㎞ 이상 떨어진 먼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수원지로부터 사비카 언덕 정상까지 물을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알함브라 전체에 설비된 물 공급 체계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수로와 수도교를 따라 도착한 물은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헤네랄리페에 모이고, 수조 탑(water tower)에 저장했다가 왕궁의 여러 구역으로 전달된다. 수도관 및 물탱크 등의 복잡한 시스템을 따라 물 공급이 이루어지는데, 낙차와 수압만으로 이 시스템이 작동되는 것이다. 곳곳에 형성된 작은 분수, 길 위를 지나가는 아치 수도교와 수로, 정원과 수조, 이 모든 것들이 급.배수 시스템을 경관예술 차원으로 승화시킨 이슬람 문명의 미학이다.

대지 일곽은 여러 건물과 영역이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크게 보면 세 구역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대지의 서쪽 끝에 가장 먼저 건설되었던 알 카사르 요새 구역이다. 둘째는 나스르 궁전 구역으로서 알함브라의 중심영역에 해당한다. 마지막은 성벽 밖 동쪽에 위치한 별궁으로서 헤네랄리페라고 부른다. 생뚱맞은 카를로스 5세의 궁전은 무어왕조와 관련이 없는 별도의 구역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구역들은 한정된 대지 조건 속에서 증개축, 또는 신축을 통해 구성되었기 때문에 정연한 기하학적 배치의 패턴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크기나 성격이 다른 건물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면서 비밀스럽고 다양한 공간적 경험을 연출한다. 서로 다른 용도와 건물 양식, 정원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었기에 예기치 않은 공간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막힌 듯 열리며, 미로같은 통로를 헤매다 만나는 작고, 우아하며, 섬세한 공간들. 무어인들의 부드러운 서정이 듬뿍 담겨있다. 그곳에 술탄의 은밀하고 신비로운 삶이 투영되기도 한다.

헤네랄리페(Generalife)는 나스르 궁 일곽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별궁이다. 무어인들이 만든 정원 양식의 진수를 담고 있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근본을 따져 올라가면 페르시아 정원에까지 닿는다. 진입부에서부터 정원으로 꾸며져 기하학적 조경의 화려한 기법들이 전개된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연출하는 동양적 조원 수법과 너무나 대조되지만, 화초와 수목을 다루는 기하학적 원예의 솜씨는 가히 예술적이다. 아치형 담장의 개구부를 통해 담아주는 알함브라의 경관도 모두 아름다운 풍경화를 이룬다.

헤네랄리페의 현재 모습은 14세기 초창 당시에서 많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남아있는 궁원만으로도 사라센 정원의 기법과 예술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미로와 같은 궁실들을 지나다 갑자기 넓게 열리는 비밀의 화원, 그것이 바로 파티오 정원이다. 파티오는 협소하고 방어적인 요새에서 폐쇄감을 완화시키는 공간적 장치다. 한옥의 뜰에 해당하지만 조경으로 정원을 꾸민다는 것이 다르다. 파티오는 강한 직선 축의 수로와 분수, 기하학적 규칙성으로 배열된 수목들로 꾸며진다. 이란(페르시아)의 사분할 정원(Charbagh)에서 기원한 이슬람 정원의 조원기법이다.

이 파티오는 철저하게 내부화된 왕실 전용 정원이다. 왕과 왕족들 이외에는 함부로 출입하지 못했으리라. 정원을 둘러싸는 주변 건물들에서 아름다운 풍경이 담기도록 아치형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낙원을 독점적으로 향유하려던 절대군주들은 결코 행복한 생애를 마치지 못했다. 대부분 독살이나 왕위찬탈 등 권력 싸움으로 희생된 것이다. 수로와 분수에는 시에라 네바다 설산에서 끌어온 신선한 샘물이 잔잔한 소리를 내며 흐른다. 나스르의 마지막 왕은 이 궁을 떠나면서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영토를 빼앗기는 것보다 이 궁전을 떠나는 것이 더 슬프구나”.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