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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철호의 울산 전란사①]자랑스러운 무(武)의 도시 울산

신라 천년역사와 경주의 찬란한 문화도 울산이 방패처럼 왜적을 막았기에 가능 끊임없는 적의 침입에 맞선 군사요충지 끝까지 싸운 울산사람 항전의식 돋보여 울산의 전란 관련 다양한 역사문화유적 체계적인 유적 발굴, 연구도 병행해야

2024-07-19     경상일보
▲ 송철호 한국지역문화연구원장·문학박사

1. 울산은 자랑스러운 무(武)의 도시다. 조선 500년 역사 속 과거시험 합격자 분포만 봐도 그렇다. 경주 등 인근 지역에 반해 울산은 상대적으로 무과 합격자가 많다. 이를 바탕으로 울산을 살짝 비하하는 사람도 일부 있다. 그런데 나는 울산이 무(武)의 도시라는 게 자랑스럽다. 약육강식의 인류 역사에서 무 없는 문은 존재하기 힘들다. 찬란한 문의 역사는 강한 무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라 천년의 역사와 경주의 찬란한 문화도 울산이 방패처럼 외부의 적을 막아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 울산은 신라의 대외 교류에서 수도 경주의 관문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울산이 관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지리적 조건과 지형적 조건이 모두 적합하기 때문이다. 울산은 지리적으로 동해와 남해의 중간부에 있어서 해양을 통한 대외 교류의 거점이 될 조건을 갖추었다. 특히 울산은 침강해안인 남해안에서 융기해안인 동해안을 연결하는 참이지대(慚移地帶)로 육지가 일단 침강해 다시 융기한 해안이다. 대체로 바다가 깊고 해안선은 단조로워서 선박이 드나들기가 쉽다.

울주군 온산읍의 회야강구에서 황성동 외항강구까지는 해안선이 잘 발달해 있으며, 황성동 남단 사이의 외항강구는 온산만을 이루어 울산항에 비유할만하다. 울산만은 동해안 중에서도 항구로서의 입지조건이 가장 좋은 곳 중 하나이다. 울산항의 죽도 서북방에 자리한 장생포항은 항내는 협소하나 수심이 깊어 크고 작은 선박의 접안에 있어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 울산대공원 충혼탑.

슬도가 가로막고 있는 방어진항은 어항으로서의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방어진항의 동쪽 대왕암 등대를 넘으면 일산만이 있어서 이 또한 작은 항의 구실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지금은 현대중공업의 대형 조선시설로 사라졌지만, 전하, 미포만도 지난날에는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춘 해안이었다. 이러한 항구적 해안 여건으로 울산은 선사시대부터 대외 교류의 장이 되었다.

한편, 관문성의 존재도 울산이 경주의 관문이었음을 알려준다. 관문성은 신라때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축조한 산성이다.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 또는 모벌관문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문성이 동해를 향해서 쌓았다는 사실은 이 성이 동해로부터 들어오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

관문성은 동쪽에서 경주에 들어올 수 있는 가장 좋은 지역인 영일만과 울산만에 상륙하는 왜적을 방어하는 데 큰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문은 나라의 현관(玄關), 요충지의 통과 지점, 또는 관(關) 자체이다. 관문성의 존재는 울산이 신라의 군사요충지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울산이 관문으로서의 성격으로 인해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사실은 천전리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천전리성은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 일대에 있다. 천전리성은 위치상으로 낙동강 하구에서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와 연결하는 전략상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천전리성은 낙동강에 상륙한 적이 경주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만든 성이다. 울주군 온양면에 가면 비옥산성이 있다. 비옥산성은 주변에 하산봉수대, 서생포 만호진성, 운화리 성지 등의 옛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남해안 방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3. 항구도시 울산이 숙명처럼 지닌 관문으로서의 성격은 외부로부터 적이 침략했을 때는 어김없이 전쟁터가 되어야 했다. 신라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울산은 끊임없이 왜적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다. 조선시대에 울산에 좌병영과 잠시였지만 좌수영을 둔 것도 울산의 이와 같은 성격 때문일 것이다. 임진왜란 때 부산 다음으로 빨리 적의 침략을 받은 곳은 울산이다. 임진왜란 최후의 전쟁터도 울산이다. 울산은 전쟁 기간 7년 내내 울산 전역에 거쳐 전선을 형성한 상태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전란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고통은 엄청나다. 울산 사람들의 삶이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더 고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울산지역 의병활동이 지니는 특징 중의 하나는 유효한 의병활동이 다른 지역보다 좀 더 오래도록 지속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 이유를 울산지역 의병들이 지닌 투철한 사명감에서도 찾을 수 있겠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장기간 일본군과 접경해 있었던 울산지역의 특수성에 기인하 바가 크다. 일본군의 점령이 장기간 지속했는데도 울산 사람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빈번한 적의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음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는 것은 울산사람들의 항전의식을 엿보게 한다. 불의한 공격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는 것, 참고 견뎌서 마침내 적을 물리치고 나의 역사를 만드는 것,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산업수도 울산을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울산은 관문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이 더 오래 전란에 시달렸다. 울산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전란을 겪었고, 전란을 겪은 기간이 긴 만큼 전란의 흔적이 많고 전란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울산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역사문화유적과 그것에 얽힌 사연들만으로도 울산은 전국 어느 도시에 뒤처지지 않는 역사문화유산을 가진 도시이다. 문제는 울산 사람들이 그것을 잘 모르거나 알더라도 그것의 가치를 드러내어 밝히는 일에 소홀했다는 데 있다. 역사문화유산은 끊임없이 새로운 자료를 찾고, 그것의 가치를 드러내어 밝힘으로써 그것의 의미를 분명히 할 때 빛이 난다.

울산의 전란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이는 드물다. 그간의 울산의 전란에 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임진왜란같은 특정 전란에 치우치거나 특정 사람, 특정 사건, 특정 문화유산에만 집중한 면이 없지 않다. 따라서 이제는 특정 사건과 사람에 집중하지 않고, 전란 관련 다양한 역사문화유산을 통시적으로 공시적으로 광범위하게, 그러나 구체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게 되면 울산이 왜 자랑스러운 무(武)의 도시인지는 저절로 밝혀질 것이다. 나아가 울산 사람들이 울산이라는 도시에 대해 자부심을 지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송철호 한국지역문화연구원장·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