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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일보 지령10000호릴레이 칼럼]언론은 역사다

경상일보 창간작업 참여, 남다른 의미 오직 사명감 하나로 신문을 제작해 온 경상일보 임직원 여러분 노고에 감사 앞으로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최고의 신문사로 성장·발전하길 기대

2024-08-12     경상일보
▲ 장성운 울주지역학연구소장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경상일보가 지령 1만 호를 맞았다. 경상일보 창간에 직접 참여했던 필자에게 지령 1만호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대학 졸업 후 반백 년 가까이 기자의 길을 걸었던 필자가 지금도 언론인으로 가장 큰 자랑이 있다면, 경상일보 창간호 1면 머리기사를 직접 쓴 것이다.

우리나라 언론사 시작은 대체로 동아와 조선이 창간했던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로 본다. 이후 많은 신문이 출간되고 기자가 배출되었지만, 지령 1만호를 넘는 신문의 창간호 1면 머리기사를 쓸 행운을 가졌던 기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었을까.

창간 무렵 울산시청에 출입했던 필자는 직할시 승격 관련 당시 곽만섭 울산시장과 인터뷰도 했는데 이 기사도 고스란히 창간호에 실려 있다.

경상일보가 창간을 앞둔 80년대 말은 울산공업단지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으로 울산은 우리나라 7대 도시로 발돋움해 광역시를 내다보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창간호 1면 머리기사도 제목이 ‘울산직할시’였다. 이때 제목을 ‘광역시’가 아닌 ‘직할시’로 붙인 것은 울산보다 먼저 광역시가 된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을 직할시로 불렀기 때문이다. 광역시라는 단어는 경상일보 창간 한참 뒤인 1997년 울산이 광역시가 되는 과정에서 생겨났고 이후 울산보다 먼저 지방정부가 아닌 중앙정부의 직접 관할을 받았던 대도시가 모두 직할시가 아닌 광역시로 불리게 되었다.

경상일보 창간 당시 울산에서는 지역 인사들 사이에 신문 창간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당시 울산은 우리나라 제일 공업도시로 노사와 공해 문제로 항상 뉴스가 넘쳐 났다. 특히 이 무렵 시작된 울산의 노사 문제는 터졌다 하면 전국 뉴스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이처럼 울산이 전국 뉴스의 초점이 되다 보니 중앙지와 타지역 언론사는 울산에 주재 기자를 파견해 놓고 이들 사건을 취재해 본사로 송고했다.

울산에 본사를 둔 신문사 창간은 시민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울산은 공업단지가 된 후 경제성장에 따른 공단 확장과 공해 문제로 공장주와 지역 주민 간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인구 급증으로 각종 사건 사고도 잦아 타 지역 언론이 이들을 특집으로 제작 보도하는 등 울산 소식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그러나 이처럼 빅뉴스가 넘쳐 나는데도 정작 울산에는 이런 각종 소식을 신속·정확하게 보도할 매체가 없어 시민이 궁금해 할 때가 잦았다.

이런 여건에서도 울산 지역 신문사 창간은 쉽지 않았다. 신문사 창립에 필요한 재정 확보가 힘들었고 신문을 제작할 인물을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실제로 경상일보가 창간을 서두르고 있을 때 타 지역에서도 신문 창간 붐이 일면서 많은 도시에서 신문사가 문을 열었지만 이 중 대부분이 재정 악화와 제작자를 구하지 못해 문을 닫는 폐단이 이어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신문 제작 대부분을 수작업으로 했기 때문에 경상일보만 해도 기자를 비롯해 처음 선발한 인원이 180여명이나 되었다.

‘경상일보’ 제호를 정할 때도 이견이 많았다. 당시 일부 주주와 시민은 창간 신문사가 울산에 본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울산신문’, 혹은 ‘울산일보’로 제호를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경영과 신문의 영향력을 울산에 한정하지 않고 부산과 마산 심지어는 서부 경남의 진주까지 확대하기 위해 ‘경상일보’로 정했다.

창간 당시 사무실은 옛 학성역 앞에 있었다. 직원 선발과 수습기자 시험 그리고 신문 제작에 필요한 장비 구매와 편집 방향을 대부분 이 건물에서 정했다. 그러나 이 사무실에는 오래 있지 않았고 창간호는 신정동으로 사무실을 옮긴 후 발간되었다.

편집국 간부 대부분은 국제신문과 부산일보가 통합되기 전 국제신문에서 일했던 언론인으로 이루어졌다. 창간 당시 이상윤 편집국장, 윤준홍 편집부장, 배승원 정경부장, 조돈만 사회부장, 양희주 문화부장이 모두 국제신문 출신이었다.

이들 중에는 당시 신문사 사무실이 옛 학성역에서 가까워 처음에는 매일 동해남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과 울산을 오가면서 열심히 일했는데 이들 중 지금은 타계한 사람도 많다.

우리나라 언론사를 보면 울산은 선두 도시다. 일제강점기 동아, 조선이 창간하기 10여 년 전인 1909년 진주에 경남일보를 창간해 지방신문의 시대를 열었던 인물이 당시 울산의 최고 부자 추전 김홍조였다.

일제강점기 동아와 조선 등 울산에서 주재기자로 활동했던 기자 대부분이 항일운동가였다는 것이 추전의 이런 언론 창달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 1989년 5월15일 발간된 경상일보 창간호 1면 지면.

울산에 처음으로 기자협회가 창립된 때가 1926년으로 동아 박병호, 조선 김기오, 시대일보 강철 기자가 협회 조직에 앞장섰다. 당시 울산에는 일본 기자가 많아 기사 취재와 보도에 이들의 행패가 심했지만 우리나라 기자들은 이들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신문 보도를 통해 조선인의 권익을 지켜내는 데 앞장섰다.

경상일보가 지령 1만호를 맞을 수 있었던 이면에는 그동안 열악한 제작 환경과 넉넉지 못한 경제적 어려움을 이겨내고 오직 사명감 하나로 신문 제작을 해온 직원들의 노고가 크다.

신문이 사회의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생각으로 한 평생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미국의 퓰리처는 “언론인은 지식인이기 때문에 변호사와 의사처럼 사회적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상일보도 이런 퓰리처의 가르침을 교훈 삼아 앞으로도 사명감을 갖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10만호 100만호를 발간 할 수 있는 신문을 제작해 줄 것을 희망한다.

장성운 울주지역학연구소장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