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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철호의 울산 전란사(2)]선사시대의 전란과 검단리 환호

수천년전 유골 등에서 원시 무기 흔적 마을 보호하기 위한 환호취락 유적 등 선사시대 치열한 전쟁 가능성 뒷받침 한반도 최초 환호취락은 검단리 유적 옥현·방기리·천상리서도 환호 발견돼

2024-08-16     경상일보
▲ 송철호 한국지역문화연구원장 문학박사

1. 선사시대에도 전쟁은 있었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사 인류가 대체로 평화롭게 살았으며 도시국가가 형성된 뒤에야 전쟁이 일상화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대체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와서는 선사시대 인류에게 전쟁과 폭력이 끊이지 않았다는 주장이 시나브로 정설화되어 가고 있다. 프랑스의 고고학자 장 길렌과 장 자미트가 함께 쓴 <전쟁 고고학>(2001년)은 선사시대 유적, 특히 인골을 의학적으로 정밀하게 검사해 석기에 벤 자국이 있는 뼈, 망치 같은 도구에 맞은 뼈, 화살촉이 박힌 뼈를 찾아냄으로써 구석기 말기와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전쟁과 폭력이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버드대의 진화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는 그의 저서 <우리 본성의 더 나은 천사들>에서 인류 역사상 전쟁이 최고로 많았던 때는 선사시대였다고 했다. 범죄 고고학 연구진은 수천 년 전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골과 혈흔 등을 분석해 사망 경위를 추정했는데, 선사시대 인간이 타살로 숨질 확률은 15%에 달했는데 반해, 20세기에 오면 그 수치는 3%로 줄어든다고 했다. 케냐 투르카나호숫가의 한 석호에서 대략 1만 년 전의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사체들은 두개골이 부서지고 화살촉, 혹은 창촉이 박혔으며 그 외에 몇몇 치명적인 상처가 있었다. 케임브리지대학교 투르카나 분지 연구소 소속인 마타 미라존 라르와 로버트 A. 폴리 등으로 이루어진 연구팀은 이 사건을 선사시대 수렵채집인들 사이에 있었던 전쟁의 예라고 결론 내렸다.

선사시대 유물 중에서 주먹도끼, 돌날, 돌화살촉, 돌도끼, 돌창, 간돌칼, 별모양 도끼 등은 원시적 무기에 포함될 수 있다. 돌화살촉의 속성 변화는 사람과 말을 죽이기에 적합한 무기의 등장을 보여주는데, 화살촉의 머리가 납작하고 작은 삼각형에서 두텁고 슴베가 달린 버들잎 모양으로 바뀌고 있다. 진주 대평리 유적의 옥방 8지구 5호 석곽묘에서 출토된 간 돌칼은 앞부분이 위로 향한 채 비스듬히 세워진 상태로 출토돼 죽은 사람의 몸에 박혔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를 통해 집단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초보적인 전쟁이 이미 있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 울산 검단리유적, 환호의 모습이 뚜렷하다.

2. 초보적인 형태의 전쟁이 일어난 때는 대략 기원전 7∼6세기경인 청동기시대 중기쯤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한국식 동검으로 대표되는 청동 무기가 다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했고, 취락의 방호시설인 환호와 목책 유적이 종종 발굴되기 때문이다. 환호는 취락을 방어하기 위해 시설된 도랑인데, 취락을 감싸는 형태의 도랑이 만들어지는 시점은 청동기시대부터다. 환호취락은 이후 초기 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에도 이어지고 삼국시대 이후에는 본격적인 성곽의 축조와 함께 자취를 감춘다.

정착 주거생활이 이어지면서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서 환호가 등장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다.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하남성 서안시 반파 유적과 섬서성 임동현 강채 유적에서 환호가 나타난다. 일본에서는 큐슈 사가현 요시노가리 유적, 오사카부 이케가미소네 유적 등 야요이시대에 환호취락이 많이 축조되었다.

환호의 기능에 대해서는 전쟁의 발생으로 인한 사회적 긴장감의 고조 속에서 취락을 방어하기 위해 출현한 것이란 견해가 대세를 이루지만 일부 동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 출현했다거나 구분을 위한 경계의 의미를 지닌다는 견해도 있다. 환호는 평면적이기 때문에 적의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데에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환호의 안이나 바깥에 토루나 목책을 결합해 방어력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환호 내측에서 정연한 목책 열이 확인된 양산 평산리 환호취락은 이의 한 예이다. 환호의 방어적 측면을 극대화시킨 것이 성곽으로서 삼국시대 성곽의 출현은 청동기시대 이후 발달해 온 환호의 완결판이라고 볼 수 있다.

▲ 검단리유적에서 발굴된 돌화살촉과 간돌칼.

3. 한반도에서 최초로 발굴 조사된 환호취락은 울산의 검단리유적이다. 그 외에 울산에서는 무거동 옥현유적과 방기리 유적, 천상리 유적 등에서 환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검단리 유적은 1990년 8월21일에 사적으로 지정됐다. 유적의 면적은 약 6000㎡(4000평)에 이르는데, 1990년 부산대학교박물관이 약 3개월간 발굴 조사했다. 조사결과 환호가 확인됐다. 회야강과 곡천천 사이의 산 능선 중앙부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낮은 구릉(해발 104~123m)의 정상부와 서남쪽 사면에 해당한다.

주거지는 유구의 중복관계와 공간배치를 통해 환호의 설치를 기준으로 해 3단계로 나누어진다. Ⅰ기는 환호 설치 이전의 취락, Ⅱ기는 환호취락, Ⅲ기는 환호가 폐기된 후의 취락이다. Ⅰ기는 집자리 26기가 확인되었는데 화재로 폐기된 집자리는 환호가 지나가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 환호 설치 때 의도적으로 폐기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Ⅱ기는 주거지 17기가 확인되었는데 주거영역은 환호의 안과 밖으로 나누어진다. Ⅲ기는 주거지 37기가 확인됐는데, 환호가 폐기된 후 구릉의 정상부와 경사면의 두 그룹으로 주거영역이 구분된다. 환호는 능선을 따라 타원형으로 둘러 있다. 규모는 총연장 298m로 남북에 각 1곳의 출입구가 있다.

검단리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환호의 완전한 모습이 확인된 유적으로서 이후 본격적인 환호취락 유적 조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환호는 선사시대에 이미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선사 문화가 발전했던 울산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검단리 유적과 무거동 옥현유적과 방기리 유적, 천상리 유적에서 발견된 환호는 선사시대에 울산에 전쟁이 있었을 가능성을 알려준다.

송철호 한국지역문화연구원장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