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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계절한담(閑談)(349)]처서매직은 풍경으로 온다

2024-08-20     이재명 기자
▲ 이재명 논설위원

모레는 ‘더위(暑)가 그친다(處)’는 뜻의 처서(處暑)다. 그런데 올해 처서는 무더위가 도무지 그치지 않는, 역대급 처서가 되고 있다. 처서가 되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다가도 그 어느 한 순간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이 보통인데 올해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해마다 쓰던 ‘처서매직’이라는 단어도 올해는 겸연쩍기만 하다. 오히려 끝없이 이어지는 열대야가 매직이라면 매직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처서는 낮기온이나 피부로는 오지 않아도 색깔로는 성큼 다가와 있다. 마당에 널려 있는 빨간 고추가 그렇고, 노란색으로 물들어가는 가로변 벚나무의 이파리가 그렇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어/ 눈 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내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가을볕’전문(박노해)

붉은 고추는 계절의 변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바로미터다. 고추는 왜 초록색에서 빨간색으로 변할까. 고추의 색깔은 캡사이신과 카로티노이드라는 두 가지 색소에 의해 결정된다. 캡사이신은 고추의 매운맛을 내는 성분으로 주로 녹색 고추에 많이 함유돼 있다. 또 카로티노이드는 붉은색 색소로, 고추가 익어갈수록 생성량이 증가한다. 고추는 이처럼 익어가는 과정에서 캡사이신의 양은 줄어들고, 카로티노이드의 양은 늘어나면서 빨간색으로 변하게 된다. 이 때가 되면 시골에서는 고추잠자리가 낮게 날기 시작하고 주변에는 가을색이 점점 짙어진다.

흔히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라고 했다. 처서를 이처럼 잘 묘사한 구절도 없다. 이 맘때가 되면 매미는 점점 자취를 감추고 귀뚜라미가 합창을 한다. 하늘에는 비구름 대신 뭉게구름이 솜처럼 피어오른다. 낮 기온이 35℃까지 치솟아도 눈에 보이는 풍경은 가을을 닮아가는 것이다.

처서가 지나면 풀이 더 이상 자라지 않기 때문에 논두렁의 풀을 깎거나 산소를 찾아 벌초(伐草)를 했다. 실제 필자의 마당에는 풀이 더 이상 수북하게 자라지 않는다. 모기도 훨씬 덜 하다. 역대급 무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계절은 알게 모르게 변하고 있다. 처서매직은 올해도 어김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