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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일산사립 보성학교와 성세빈 선생

2024-09-04     경상일보
▲ 장세동 울산동구문화원 지역사연구소장

역사의 뒤안길은 평탄한 길보다 굽어진 길이 더 많고, 장애물로는 질병보다 더 무서운 문맹의 대물림이다. 어려운 것, 억울한 것 조차 업보로 여기던 시대엔 가난한 빈촌엔 멘토가 있을 리가 없었다. 가난해서 배움이 없었으니 문맹의 억울함도 알지 못했다. 팔자소관이거니 생각하며 살았다.

관헌도 억울한 백성들 편이 아닐 때가 많았고, 양반층은 하층민들을 억압의 대상으로, 수탈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동학 농민봉기’가 아니던가. “농민도 사람이다”라는 기본권의 호소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 ‘울산목장’내의 거주민들은 왜란을 피해 산야로 숨어들었다가 국란이 끝난 후에도 돌아오지 않고 산야나 바다로 흘러 다니는 유랑자로 살거나 화전민이 되어 이전의 거주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항산(恒産)이 있는 자만 돌아왔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돌아오기 싫은 사정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만하지 않을까 싶다.

임란이 끝나고 50여 년이 지났는데도 노동력이 없어서 당시의 사회 기간산업에 해당하는 병마를 기르던 목장(牧場)마저 폐장되어 있어서 조정은 난망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조정에서 울산, 동래, 창원 등지에 소모진(召募鎭)을 설치하게 된다.

유랑자 중에 가옥과 전답을 내주어 소모인을 모집했고, 일정한 훈련을 시킨 뒤에 유사시에는 군인으로 전환하게 했다. 1651년에 와서 옛 마성을 반쯤 줄여서 새로이 마성을 신축하였으니 이것이 남목의 신마성이다. 여기에 1654년에 말을 들어다 목장을 다시 열었다.

관료인 양반사회가 하층 민중을 지배와 억압의 대상으로만 여겨 문맹의 나락으로, 노비의 계층으로 고립시켜나갔으니, 국난 때 어디서 애국심이 발현되겠는가.

처음에는 담 너머 불구경하다가 뒷날에는 양반지배층을 국란의 책임자로 몰아가 방화와 학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한 문맹자를 양산해놓고 애국심을 기대하는 것은 몰염치한 일이 아닐까 싶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 전후의 동구(동면)에는 일본 서남해 세토해안의 어민들이 이주해와서 방어진항 주변에 자리 잡고, 통감부와 총독부의 비호 아래 ‘일본인회’가 주도하여 일본인 마을과 도로, 공공용지와 상가용지 등을 나누고 여기다 순사주재소, 일본인소학교, 어업조합, 조선소, 상가지역 등 경제적, 문화적 여건들을 모두 장악하면서 자신들이 식민지국의 주인이라는 뜻의 ‘내지인’ 행세를 하고, 그들이 사는 마을 ‘내진’으로 부르면서 도둑이 주인 행세 하듯 자신들이 만든 권력인지 폭력인지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이에 일산 마을에서 성세빈 선생의 주도로 ‘일산사립 보성강습소’가 설립되고 농어촌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문맹퇴치운동’의 시작이었다. 이도 공립학교가 되면,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일본교육의 이념대로 교장과 담임은 일본인으로 채워지고 일본식 교육을 가르치기 때문에, 조심조심 ‘사립 강습소’라는 이름으로 민족의식을 잃지 않도록 아이들을 가르쳐왔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서슬 퍼런 감시 아래 ‘사설 일산 보성강습소’의 설립(1922)은 풍전등화로 여겼으나 광복되던 해까지 끈질긴 여정으로 문맹퇴치 운동의 길을 이어가고, 항일운동으로 당당히 걸어왔다. 일산사립 보성학교의 창설자요, 교장이던 성세빈 선생은 울산 지역 재야의 스승이요, 참교육자이시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성세빈 선생을 떠올리게 하는 이유이다.

장세동 울산동구문화원 지역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