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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붉은 도끼[94]]11. 백운산 그늘의 사람들(5) - 글 : 김태환

2024-10-02     경상일보

며칠 있으면 대곡박물관에서 특별한 전시회를 하는데 자기에게 연락이 왔다고 했다. 전시회를 여는 사람은 일본인 여류화가인데 출생지가 언양이라고 했다.

“이름은 유리라는 분인데 나에게 연락이 온 것은 이분이 우리 작은 할아버지의 딸이라는 겁니다.”

나는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바로 김재성씨와 부녀지간의 정을 이어온 에리코의 딸이었다. 미술을 전공했다는 이야기는 기록에 언급되어 있었다.

“그런데 박물관에서 미술 전시회도 여는가요?”

“그분의 그림이 모두 천전리 암각화 문양을 모티브로 한 것이라네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 일본인이 그린 암각화 그림은 뭔가 의미가 다르겠지요.”

“유리라는 분 연세가 80이 되었을 텐데요. 대단하네요.”

“그분을 아세요?”

“작은 할아버지의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작은 할아버지와 친구였던 일본인 순사의 딸이었죠. 그러니 이곳에서 출생했나봅니다.”

김인후는 이 소식을 작은 할아버지에게 들려줄 생각을 하니 신이 나는 가 보았다. 나는 김재성 노인이 귀국할 때 돈을 얼마나 가지고 왔는가 물어보았다. 김인후의 대답으로는 그리 많은 돈을 가지고 온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지금은 남아 있는 현금이 전혀 없다고 했다. 들어온 지 얼마 후에 미호천 상류의 상동 마을에 임야가 달린 논을 좀 사놓았다고 했다. 그 논의 임대료로 쌀 열 가마를 받는 게 전부라고 했다.

“돌아가시면 본인의 희망대로 그 산에다 묘를 써드려야 할 것 같아요. 논을 부치는 사람에게 산소관리를 맡기면 되겠죠.”

나는 김재성 노인이 의외로 적은 금액을 가지고 들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큰 건설회사를 일구었으면 자기 몫으로 상당한 금액을 들여올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요양원에서의 면회절차는 무척 까다로웠다. 최근 코로나 확진자가 요양원에서 많이 발생하는 관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일전에는 남구의 한 요양원에서 대규모 확진자가 나오는 바람에 난리가 났었다. 수용되어 있는 노인들이 극도로 면역력이 약한데다가 한 병실에 여러 명이 밀집 수용되어 있어 방역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김인후와 나는 면회실에서 발열체크를 마치고 손 소독을 한 후 간편한 비닐 방역복까지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10여 분을 기다리자 휠체어 한 대가 노인을 태우고 나타났다. 김인후는 노인을 보자마자 ‘할아버지’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물기가 잔뜩 묻은 목소리였다. 노인이 유리문 너머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노인의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친 남자라면 뭔가 특별해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 앞에 보이는 노인의 모습은 무척이나 평범해 보였다. 대머리는 아니지만 흰 머리카락은 숱이 얼마 남아있지 않아 두피가 훤히 들여다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