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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붉은 도끼[98]]11부. 백운산 그늘의 사람들(9) - 글 : 김태환

2024-10-10     경상일보

어떻게 생각해 보면 20대에 남의 부인에게 정신이 팔린 김재성 노인보다는 내가 더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을 것 같았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 멀쩡한 부인을 두고 바람이 났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생각해보니 아찔했다.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사랑은 모든 걸 감내해내야 하는 것이라지만 이것의 실체가 사랑인지 알 수도 없었다. 어쩌면 치매에 걸린 노인의 노망쯤으로 치부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 내가 노망이 난 걸까? 고속열차가 천지를 흔들며 지나간다. 내 모든 사고의 틀이 엉망진창으로 곤죽이 되어 흘러내리는 것 같다.

그날 밤 12시가 넘도록 김인후와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요의를 느껴 잠이 깨어 보니 벌써 날이 희부윰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볼일을 보고 나서 다시 자리에 누울까 하다가 그대로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김인후는 그때까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대곡댐이 가까이 있어 그런가 보았다.

국도로 들어서 곧장 언양 방향으로 달리다가 구량리에서 좌회전을 해서 서석곡으로 들어갔다. 서석곡은 겨울잠에 들어있는 듯 조용했다. 차에서 내리니 겨울 새벽공기가 싸늘하게 느껴졌다. 서석 앞에 서서 문양들을 살펴보았다. 김재성 노인의 기록에 나와 있는 문양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맨 윗부분에 있는 연속된 겹마름모꼴은 다섯 개 마을의 표시라고 했다. 그것은 어떤 고대문자 해독학자가 달려들어도 반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밑에 별도로 떨어져 있는 겹마름모꼴이 다섯 개 마을과는 다른 해안가에서 고래잡이를 하며 살았던 마을의 표시라고 했다. 이름을 사흘이라고 불렀다는 미호 마을의 청년 문양을 찾아보았다. 바위면에서 문양을 찾아내는 게 쉽지는 않았다. 바위면 바로 앞에 보기 쉽게 안내판에 새겨진 문양에서 겨우 사람모양을 찾을 수 있었다. 김재성 노인이 좀 더 자세하게 기록을 했더라면 찾기가 쉬웠을 것인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김재성 노인도 50년 전에 들은 이야기라 상세하게 기억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았다.

정말 아쉬운 것은 김용삼이었다. 김용삼의 할아버지 김일환 노인도 오천 년 동안이나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를 들었을 터인데 그것을 왜 후대에 정확하게 이어주지 못했는지 아쉬웠다. 김용삼은 어려서 할아버지가 서석 앞에서 아버지를 나무라는 걸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아마 김용삼의 아버지 대에서 이야기의 전달이 끊어진 것 같았다.

혹시라도 김일환 노인 외에도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백운산 청년단이라는 항일단체에서 활동하던 사람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보훈처에서 그 사람들의 존재를 찾고 있으니 조만간 나타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 후손들을 찾아가 서석문의 해독에 대해 물어볼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