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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일근의 여행편지 -10- 한듬 가는 길

2004-10-12     경상일보
"한듬" 가는 길을 아시는지요?
 한듬. 티끌하나 섞이지 않은 순한 우리말이지요. 입 속에 넣고 한듬 한듬 중얼거려보면 몸도 마음도 덩달아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몸이 맑은 물이 되는 느낌. 그 물에 송사리 몇 마리 놀고 있는 느낌. 지치고 힘들 때, 외롭고 그리울 때 나는 한듬이라고 중얼거려봅니다.
 이 시월, 나는 한듬 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읽던 책도 덮어버리고 휴대폰도 꺼버리고 한듬 가는 길 위에 섰습니다. 오랫동안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자처했지만 시월의 시작은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 내 마음의 그릇에 오랫동안 수평을 이루고 있던 물이 시월 들어 요란하게 출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의 급경사를 치유하기 위해, 마음의 물 잔에 다시 수평을 이루기 위해 나는 반드시 자연을 찾습니다. 자연처럼 좋은 병원이 없습니다. 시(詩)로도, 음악으로도, 독한 술로도 고칠 수 없는 마음의 아픔이 있을 때 자연은 나에게 최상의 치료약입니다.
 내가 한듬 가는 길을 처음 들은 것은 대여섯 살 어린 나이였습니다. 나에게 종고모님이 되는 분이 한듬에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을 "한듬고모"라고 불렀습니다. 그 때 내가 들은 한듬은 길이 없는 세상의 끝이었습니다. 길 없는 길을 걸어가야 한듬에 닿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내게 오랫동안 한듬은 오지의 대명사였습니다. 가기 두려운 먼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듬 가는 길을 처음 찾아간 것은 서른을 넘기고 나서였습니다. 그 해는 감농사가 풍년이었던 해였고 그 날은 그 감들이 유난히 붉었던 날이었습니다. 한듬의 감나무마다 달려 빛나던 붉은 등불들을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서른 즈음에 정치적인 문제로 많은 것을 잃어버린 나는 한듬에서 펑펑 울고 돌아왔습니다. 남자가 울기 좋은 곳이 한듬이었습니다. 한듬은 초행의 나를 받아주었고 또 안아주었습니다. 한듬 물가에 앉아 펑펑 울었습니다. 내 몸에 가진 슬픔의 물기란 물기는 모두 짜내어 버리고 잘 마른빨래가 되어 나는 돌아왔었습니다. 그 때부터 한듬은 나에게 자연병원이 되었습니다.
 이제 한듬 가는 길을 가르쳐 드려야겠습니다. 한듬은 울산의 솥발산과 양산의 천성산이 함께 만드는 계곡 사이에 숨어있는 산골마을입니다. 한듬 가는 길이란 산과 산 사이의 계곡을 따라 가는 무위자연의 길입니다. 송사리 떼가 살고 있는 맑은 물을 건너기도 하고 산자락에 그어진 눈썹처럼 아슬아슬한 길을 조심조심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그 길은 사람의 발이 만든 길입니다. 인위적으로 낸 길이 아니라 오직 사람의 발이 걸어 만든 길. 바위가 길을 막으면 그 옆으로 둘러 가고 들꽃이 피어있으면 잠시 쉬었다 가는 자연의 길입니다. 산이 높아지면 길도 높아지고 산이 낮아지면 길도 낮아지고 그 길 따라 물소리도 높아졌다 낮아졌다 사람과 같이 걷는 길입니다. 그런 길이 끝나는 쯤에 한듬 마을이 감나무마다 등불을 밝히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듬은 큰산이란 순수 우리말입니다. "듬"은 산이란 말이지요. 여기에 크다는 뜻의 관형어 "한"이 붙어 큰산을 한듬이라 했습니다. 나는 한듬이란 우리말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도 기분이 좋습니다. 해남 두류산의 옛이름도 한듬산이었습니다. 그러다 "한"이 "대"(大)라는 한자어를 빌어 대듬산이 되었다가 다시 대둔산이 되었다가 끝내는 두류산이 되었습니다. 대전이란 도시 이름이 한밭에서 왔던 것처럼.
 한듬이란 지명이 제 이름을 한자어로 바뀌지 않고 있는 곳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여기 한듬 뿐입니다. 이는 한듬의 맑은 순수성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한듬이란 말을 중얼거려보면 우리가 스스로 맑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사는 마을만 해도 그렇습니다. "솥발산"이 정족산(鼎足山)이 되고, 물이 많던 고개 "무티"가 무제치(舞祭峙)로 변한 지 오랜 일입니다. 그 때문에 한듬이 처음의 이름을 그대로 남아있어 한듬 가는 길은 모국어의 원형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종고모님이 한듬을 떠난 지 오래입니다. 한듬마을이 없어진 지도 오래입니다. 한듬에는 이제 빈집들과 이름만 남았지만 아직도 나에게 한듬 가는 길은 자연으로 회귀하는 길입니다. 비록 많은 것이 변했다 해도 한듬은 여전히 맑디맑은 물이 흐르고 옛날의 쑥부쟁이가 피고 옛날의 산새들이 우는 한듬입니다.
그 길을 걸어 한듬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여행수첩-----------------
한듬을 찾아가려면 양산 통도사를 지나 천성산 내원사로 가야한다. 내원사 매표소에서 다리를 건너가지 말고 개울을 따라 직진하면 된다. 한듬이란 안내판은 없다. 노전암 가는 길을 따라 가면 옛 한듬마을이 나온다. 최근 노전암에서 계곡의 오른쪽으로 흉측한 도로를 만들어 놓았다. 한듬 가는 길은 그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계곡의 왼쪽으로 산길이 있다. 길가에 "노전"이란 돌비석이 서있는데 그 비석의 왼쪽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내원사 매표소에서 한듬까지 천천히 걸어도 1시간이면 닿는다. 한듬 가는 길은 급하게 걸어야 할 이유가 없다. 천천히 걸어 당도해야 한듬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