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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혜숙의 한국탑 순례-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2005-01-25     경상일보
중원땅 남한강변, 탑평리 칠층석탑 앞에 서면 유치환의 시 ‘깃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높은 토단 위에 14.5m의 거대한 탑은 우주의 중심에 꽂힌 깃발처럼 한껏 위엄을 자랑한다.
 얼마 전 인도와 네팔을 다녀왔다. 탑의 원류를 찾아가는 여행이기도 했다. 기원전 3세기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은 인도 전국에 8만 4천기의 탑을 건립하였다. 그 후 무슬림의 침략으로 대부분 부서졌으나 산치에 남아있는 3기의 탑은 초기 불교의 스투파 형식을 잘 보여준다. 그 중 온전히 남은 산치 제1탑은 그 균형 잡힌 아름다움과 거대함에 있어 세계 최고의 불교 조형물이다.
 산치대탑 앞에 서면 "우주의 중심이 여기로구나, 진리의 꽃이 이 탑으로 인해 만발하는구나”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그들은 탑을 세우는 곳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복발형의 커다란 탑에는 야슈티라는 중심 기둥이 있고 그 기둥 아래 즉 세계의 중심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안치하였다.
 바라나시의 사르나트에도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첫 설법을 한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 아쇼카왕이 세운 다메크탑이 있다. 이 탑을 보기 위해 3번이나 거듭 인도 여행을 갔다. 아니 인도를 갈 때마다 이 탑을 찾아갔다. 다메크탑이 있어 인도는 언젠가 다시 불교가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인도에서 많은 탑을 보고 네팔의 카트만두로 갔다. 카트만두 시내에는 복발형의 라마 탑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보드나트 스투파를 보았다. 그 스투파 주위로 둥글게 티벳 난민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불심이 깊은 티벳 사람들이 스투파 바깥벽에 죽 늘어서 있는 마니차를 돌리며 종일 탑돌이를 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히말라야가 만년설을 이고 내려다보는 곳에 있는 보드나트 스투파는 하얀 칠을 하여 더욱 웅장했다. 그 탑을 돌며 그곳이 또한 세계의 중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나는 서둘러 신라 탑을 보러갔다. 산치대탑처럼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역시 우리만이 지난 고유의 예술혼이 푹 배인 탑이라 꼭 안아주었다. 둥근 산과 이골 저골 흐르는 물과 어울리는 탑이다. 우리의 자연환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들판과 산사를 지키고 서민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새삼 신라인들의 조형예술에 감탄을 하였다. 그건 산치대탑이나 다메크탑과는 다른 뭉클한 감동이었다.
 탑평리 칠층석탑은 신라 탑이다. 중원 땅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패권을 쥘 수 있는 요충지였다. 그 곳을 차지하는 것은 힘과 부의 과시였다. 통일신라는 힘의 충만함을 알리기 위해 한반도의 중심에 우뚝하고 날렵하게 탑을 세웠다. 그들은 한반도의 중심, 나아가서는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넘치는 기백을 담아 한껏 염원을 표출한 것이다.
 삼국은 모두 이 땅을 차지하려고 애를 썼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남하정책을 펴서 이 땅을 차지하고 중원 고구려비를 세우기도 했었다. 탑과 가까운 곳에 중원 고구려비가 남아있다.
 한반도의 중심임을 나타내고자 세웠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 탑을 중앙탑이라 부른다. 충주 사람들은 한반도의 중심에 살고 있음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한다. 그리고 중앙탑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중앙탑 앞에 서면 산치대탑을 보는 설렘과는 다른 내 것에 대한 따뜻함이 핏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낀다.
 강변은 지대가 낮다. 그리고 범람의 위험도 있다. 그러나 뛰어난 풍광과 함께 이곳은 남과 북을 이어주는 길의 고장이다. 누구나 길을 가다 쳐다 볼 수 있고 안녕을 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높은 토단을 쌓고 신라 탑으로는 유일하게 칠 층이라는 탑을 조성하였다.
 중앙탑은 그래서 늠름하다. 강물에 제 얼굴을 비추기도 하고 노을 빛에 한껏 몸을 맡기기도 한다. 물안개에 휘감기고 비바람을 고스란히 다 받아들이기도 한다.
 상 하층의 기단은 면석과 갑석이 여러 매의 돌로 짜여졌다. 탑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각 면석에는 3개 혹은 4개의 탱주와 우주가 새겨져 있다. 탱주의 수가 불규칙하고 탱주 사이의 간격이 고르지 못한 것은 보수 당시 변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몸들과 지붕 돌도 6, 7층을 제외하고는 여러 장의 석재를 사용하였다.
 지붕 돌의 아래 면은 매 층 5단의 층급을 두었고 윗면에는 2단의 탑신 괴임대를 구성해 놓았다. 상륜부는 노반석을 이중으로 놓고 복발 앙화가 남아 있다.
 9세기의 이른 시기에 세워진 이 탑은 국보 제 6호이다. 중앙탑은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한반도의 중앙에 세계의 중심이라는 깃발을 달고 미래를 향해 서 있다.

◆ 주변 볼거리
탑평리 절터 주변은 충주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옆에는 충주 박물관이 있다. 규모는 적지만 내용물은 알차다. 꼭 한번 둘러 볼만하다.
 중앙탑에서 약 1㎞ 떨어진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 어귀에 중원고구려비가 있다. 비는 두툼한 돌기둥 모양이고 네 면에 모두 글씨가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 규모가 작지만 만주 집안의 광개토왕비와 매우 닮았다. 장수왕 때 한강 하류의 여러 성을 공격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충주 하면 탄금대를 빠트릴 수 없다. 남한강가의 대표적인 명소다. 탄금대는 해발 200m 정도의 산이며 본래의 이름은 대문산이다. 지금은 공원으로 가꾸어져 산책길로도 운치가 있다. 산책길을 따라가면 아동문학가 권태응의 ‘감자꽃’ 노래비, 탄금대비, 우륵선생추모비, 탄금정, 신립장군전적비 등 기념물이 많다. 탄금대라는 이름은 우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탔다는 데서 유래했다.
 충주는 수안보 온천이 가까워 숙박할 곳이 많다. 하룻밤을 묵고 월악산을 찾아가면 좋다. 풍광도 빼어나지만 미륵리 절터의 석조물과 덕주산성의 흔적들, 그리고 사자빈신사터의 사사자석탑은 또 다른 여행의 즐거움을 준다.

◆ 찾아가는 길
울산에서 충주로 가는 길은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뚫려 훨씬 가까워졌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 방향으로 가다가 구미를 지나 김천에 접어들면 중부내륙고속도로 분기점을 만난다. 선산, 상주, 점촌, 문경, 괴산, 수안보를 지나면 충주IC가 나온다. 이곳으로 나가지 말고 조금 더 가서 북충주IC를 빠져나간다. 북충주IC를 빠져나와 우회전하여 82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금면 방향으로 간다. 중원고구려비(국보205호)를 지나 조금가면 충주호 조정지댐 옆의 넓은 터에 중앙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