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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클래식이야기]독일어 못해 성공한 '드보르작'

2005-07-12     경상일보
드보르작(1841쥨1904)은 1841년 프라하에서 약 30㎞ 떨어진 몰다우 강변, 보헤미아 지방의 뮤르하우젠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8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이 마을에서 정육점과 여관을 겸해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는 낙천적인 성격으로 노래를 잘 불렀고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연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10세 때는 마을 오케스트라에서 부친과 나란히 제 2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부친은 이를 자랑으로 여겼고, 자기 여관에 숙박하는 손님들 앞에서 드보르작에게 연주를 하게해서 칭찬 받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전문 음악가보다는 그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가업을 물려 줄 생각이었다. 따라서 드보르작에게는 정육점을 운영하기 위한 조건이 필요했다.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상류사회에서 통용되던 독일어를 필수적으로 배워야만 했다.

부친은 드보르작이 13세가 되자 '즈로니체'라는 이웃의 조그마한 마을에 보내 친척 집에 지내게 하면서 정육점 수업과 독일어 공부를 시켰다. 그를 가르칠 독일어 선생인 '안토닌 리프만'은 실은 이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선생이었다. 리프만은 드보르작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바이올린을 비롯해 피아노, 오르간 등의 연주법은 물론 음악이론의 기초와 작곡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지도했다.

드보르작은 1856년 드디어 정육점 조합으로부터 육류판매업의 자격증을 받게 된다. 그러나 독일어는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부친은 걱정이 되어 다시 1년 정도 독일어를 집중적으로 공부시킬 생각으로 선생을 바꿔 이번엔 '체스카 카메니체'라는 조금 더 멀리 떨어진 마을로 그를 보냈다.

그러나 그곳의 독일어 선생도 또한 음악 선생이었다. '한케'라는 그 선생은 큰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드보르작에게 음악 지도를 했고, 특히 오르간 주법에 대해 열심히 지도했다. 그 결과 얼마 안돼 선생의 대리로 연주를 하게 됐고, 교회 성가대의 지휘를 맡기도 했다. 드보르작의 나이 겨우 15세의 일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드보르작은 음악선생이었던 '리프만'에게 다시 음악 공부를 지도 받는다. 리프만은 그를 전문 음악가로 길러야 한다고 부모를 적극적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드보르작의 부모는 할 수 없이 그를 본격적인 음악 전문 교육을 시키기 위해 프라하로 보냈다.

그해 10월에 16세가 된 드보르작은 나중에에 '프라하 음악원'이 되는 프라하 오르간 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음악가가 된다는 희망에 열심히 공부를 했고, 그의 재능은 주위의 주목을 받을 만큼 두드러졌다. 그의 학교 성적은 우수해 늘 상위권에 머물렀다. 하지만 드보르작은 이곳에서 한번도 일등을 해 본적이 없었다고 한다. 음악만으로는 그가 일등이었지만 독일어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늘 2등만 한 것이었다.

이것은 결코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만일 독일어가 능숙했더라면 그는 결코 그곳에 있지 못했을 것이며 전 세계가 사랑하는 '신세계 교향곡', '슬라브 무곡집', '첼로 협주곡' 등 200곡이 넘는 그의 작품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바이올린 솜씨가 좋은 정육점 주인으로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이후 음악가로 크게 성공한 드보르작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훈장을 비롯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명예음악박사를, 프라하 대학으로부터는 명예철학박사를 받았다.

1901년에는 오스트리아 종신 상원의원에 선출됐고, 귀족의 칭호도 수여됐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온 국민의 끝없는 애도의 행렬과 함께 국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됐다. 지금도 그와 그의 음악은 체코를 비롯한 전 세계인의 변함없는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