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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클래식이야기]'교향곡의 도깨비' 안톤 브루크너

2005-08-16     경상일보
지난 6월 한 달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는 전국 교향악 축제가 열렸다. 그 축제에는 울산시립교향악단을 비롯해 전국 20여개 교향악단이 참가해 음악적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해마다 열리는 축제이지만 이번 교향악 축제에서 가장 많이 연주됐던 곡은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의 교향곡이었다. 브루크너는 9개의 교향곡을 남겼는데, 서로 약속한 것도 아니지만, 그 중 제3번, 4번, 5번, 그리고 제7번이 연주되어 브루크너는 이번 축제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작곡가가 되었다.

아직까지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이름이기도 한 브루크너는 오스트리아 북부의 안스펠덴(Ansfelden)에서 초등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성 플로리안 수도원(St. Florian Abbey)의 아동 합창단원이 되면서 그는 종교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청년기의 대부분을 그 수도원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봉사하게 된다. 교사였던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한때 교직에 몸담기도 했지만 음악적 재능을 살려 32세 때는 린츠(Linz) 성당의 전속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35세 때는 런던에서 열린 국제 오르간 경연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면서 세계 최고의 일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 대위법의 대가였던 지몬 제히터(Simon Sechter, 1788~1867)의 제자가 되면서 작곡가로서의 기초를 마련해 나갔다.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길은 멀고 험한 듯 그의 작품은 좀처럼 세상에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브루크너는 끊임없이 작곡에 힘을 쏟아 일생동안 베토벤처럼 9곡의 교향곡을 썼고 그 밖에도 뛰어난 종교음악이나 성악곡, 기악곡 등을 남겼다. 그의 마음 속에서 언제나 울리고 있었던 것은 청년시절부터 친밀히 지내왔던 성 플로리언 수도원의 파이프 오르간 소리였는데, 그의 교향곡은 어느 것이나 오르간의 광대하고 깊은 울림이 바탕이 됐다. 이것은 그의 음악적 특색의 하나가 되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어떤 곡이나 매우 길다. 그래서 그의 반대자들은 그를 두고 '교향곡의 도깨비'라는 말로 비판했다.

그의 교향곡은 1시간이 넘는 긴 시간과 방대한 악기 편성, 오르간과 같은 효과를 내는 금관악기, 그리고 대위법을 사용한 대단히 철학적이고 심오한 음악으로 연주하는 것도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 때문인지 그의 교향곡은 생존 중에는 공정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9개의 교향곡 가운데 고작 제7번 교향곡만 어렵게 공개 연주되어 호평을 받았지만, 나머지 곡들은 실제로 들어볼 기회 조차 없었다고 한다.

작곡가로서 브루크너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부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에 '브루크너 협회'까지 설립되어 해마다 그의 진가가 폭넓게 재조명되고 있으며, 많은 교향악단이 그의 교향곡에 도전을 하고 있다.

브루크너는 생김새나 성격, 옷차림, 생활신조 등 모든 것이 음악가라기 보다는 수도사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사실 그는 신앙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였으므로 수도사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브람스처럼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브루크너는 나이가 들어도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했고 욕심도 없었다고 한다. 일상생활 또한 지극히 검소해서 초등학교 교직원 시절에는 박봉을 아껴 연구비에 충당했으며, 서른 살이 지난 후에도 스승을 찾아서 대위법을 배우러 가는 만학도 이기도 했다.

브루크너는 일평생 경건한 종교심을 잃지 않았던 사람으로 동시에 소박하고 순진한 마음을 계속 유지하며 음악에 관한 일 이외에는 일체 무관심한 생활을 한 야인이었다. 그는 누가 어떤 악평을 하든 초연하게 자기 생각대로의 음악을 썼던 것이다. 그의 작품을 사람들이 듣기 시작한 것은 유럽에서도 비교적 최근의 일로 지하의 브루크너가 이런 사실을 안다면 틀림없이 놀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