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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클래식이야기]9번 교향곡의 징크스 '구스타프 말러'

2005-08-23     경상일보
지금 한국에선 말러를 좋아하는 사람, 즉 '말러리안(Mahlerian)'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그 요인으로는 불안과 의문이 가득 찬 말러 음악이 지금 사람들의 고민과 부합되어 공감을 얻고 있고 부천시향, 대전시향 등의 교향악단이 장대하고 복잡한 형식의 말러 음악에 도전하여 앞을 다투어 연주하는 데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던 말러에 대한 많은 일화는 충분한 이야깃거리와 함께 곡의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여 감상의 재미를 한층 더해준다.

유태계 보헤미안인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독일 근대 낭만음악에 있어서 최대이자 최후의 교향곡 작곡가이며, 당대 제일의 지휘자였다. 그는 낭만주의에서 꽃 피웠던 관현악법을 극도로 확대시켜 9개에 이르는 대규모의 교향곡을 작곡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성악곡을 남겼다. 음악사상 그가 차지하는 업적은 양적인 면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베토벤에서 절정에 달했던 독일 교향곡은 슈베르트, 슈만을 거치며 점차 내리막길을 걸었고, 브람스와 브루크너에서 어느정도 마감했다. 그러다가 다시 말러에 의해 이 거대한 형식은 새롭게 제 2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9개의 교향곡을 남긴 말러의 아홉 번째 교향곡에 관한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말러는 1908년 여름부터 다음해 여름에 걸쳐서 '대지의 노래', 즉 '제 9번 교향곡'을 썼다. 하지만 그는 이 곡에 '제9번 교향곡'이라는 표제를 달지 않고 '대지의 노래'라는 제목 만을 붙여서 발표했다.

그 이유는 베토벤을 비롯하여 슈베르트, 브루크너 등이 교향곡 제 9번을 쓴 후 사망했기 때문에 불길한 9라는 숫자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말러는 '9번 교향곡의 징크스'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러가 그 다음에 작곡한 교향곡은 표제가 없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교향곡 제 9번'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말러 또한 '9번 교향곡의 징크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다음 교향곡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역시 '9'라는 숫자가 말러에게도 운명적인 숫자였던 것이다.

말러는 41세에 결혼을 했는데 신부는 당시 무려 18살이나 차이가 나는 23세였다. 거기에다 결혼식 또한 평범하지가 않았다. 당시 그는 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일하고 있었다. 매사에 철저한 것을 좋아했던 말러는 오페라 연습을 할 때에는 단 1분도 지휘대를 떠나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그가 하루는 연습 도중 지휘봉을 무대감독에게 맡기며 "한 시간만 어디 좀 다녀오겠네"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오페라 단원들의 놀라움은 당연히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1시간 뒤에 말러는 자리로 돌아와서 연습을 계속 했다. 연습이 모두 끝난 후 궁금했던 단원들은 말러와 가장 친한 친구를 보내 그에게 도대체 어딜 다녀왔는지 알아보게 했다. 친구의 물음에 그는 태연스런 어조로 "결혼식을 올리고 왔지"라고 말했다.

말러가 살아있을 때는 작곡가보다는 지휘자로 더 알려져 있었다. 특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그의 작품의 진가는 20세기 후반인 1960년대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후기 낭만파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과도기적 역할을 훌륭히 완수함과 동시에 20세기 음악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