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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기행]세상에 머물지 못한 떠돌이 바람

2005-08-29     경상일보
 
모스크바 발, 상트페테르부르그 행 23시55분 야간열차. 침대칸에 몸을 뉘인지 2시간정도 지났다. 피곤이 몰려오지만 쉬이 잠은 오지 않는다. 아래 칸 침대에는 보드카를 마신 러시아인이 그들 특유의 향을 풍기며 코를 골고있다. 어린 시절 이상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푸시킨과 러시아 대문호들. 지난 며칠 동안 모스크바에서 그들의 행적을 찾아다닌 흥분이 아직도 채 가시질 않았다.

아르바트가에 들어섰다. 푸시킨이 걸어 다녔을 거리에 서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인다. 캐리커쳐 화가, 인형 같은 각선미의 여인들, 과일 가게, 잡화상들, 그 틈에 빨간 모자를 쓰고 우리나라 휴대폰 광고지를 돌리는 청바지의 여학생이 참 예쁘다. 엉덩이에 하트문신을 넣으려고 팬티를 살짝 내리는 아가씨의 노출이 아슬아슬하다. 정열과 자유의 거리다.

낯선 거리 풍경에 허둥거리며 아르바트가 53번지 연녹색의 '푸쉬킨 생가'로 들어선다. 푸시킨은 11세 때 귀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떠난다. 그때까지 그의 흔적은 나폴레옹전쟁의 화마로 인해 거의 소실되었다. 그의 외조부가 표트르대제를 섬긴 이디오피아 흑인 귀족이었다. 그래서 푸시킨을 '아프리카적 정열로 살다간 삶'이라 한다. 당시 러시아의 귀족집안은 대부분 프랑스어를 사용했지만 유년시절 그는 아름다운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외할머니의 영향과 낭만 시인이던 백부, 친지들의 학습 하에 자랐다.

생가 2층으로 올라서자 그가 쓰던 오래된 책상이 놓여있고 벽에는 결혼전날 파티에 모인 친구들의 초상이 걸려있다. 나탈리아의 초상 앞에서 멈춘다. 푸시킨이 죽고 난 후 재혼한 37세의 나탈리아다. 유화 특유의 명암이 아름다운 얼굴 윤곽을 더욱 뚜렷하게 잡아내지만 표정은 어둡다. 그녀의 여동생 에카테리나의 초상도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푸시킨이 죽기 두 달 전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당테스의 아내가 된 여인이다.

푸시킨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들과 동시대를 호흡한 많은 사람들을 모델로 하여 작품을썼다. 극도의 과장이나 허구적 인물 묘사보다 당시 사람들의 내면과 현실세계를 파고들며 조화롭게 러시아인들을 그려 나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러시아어로 사실적 작품을 쓴 그를 '러시아 국민문학의 창시자'라 부른다.

그의 운문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의 여주인공 타티야나는 청년 푸시킨이 유배시절에 사랑한 라에브스카라는 장군의 딸 마리아가 그 모델이다. 이 소설에서 여주인공 타티야나는 시골에 내려온 오네긴을 사랑한다. 오네긴은 시골뜨기 처녀 타티야나의 구애를 거절한다. 그는 훗날 귀부인이 된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구애를 하지만, 타티야나는 오히려 설교로써 그를 거부하고 돌려보낸다.

이 소설에서 '잉여인간'형의 오네긴은 무력하게 유배지를 떠돌던 푸시킨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 자신도 소설 속 오네긴이나 그의 아내와 염문을 뿌리는 당테스처럼 공작부인과 불완전한 밀애를 나눌 정도로 방탕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관능적 사랑을 경험한 푸시킨의 이상적 여인은 교태적인 아내 나탈리아가 아니라 옛사랑인 타티아나의 모델 마리아일지도 모른다.

푸시킨은 결혼식에서 신부의 손가락에 끼워주던 반지를 떨어뜨린다. 교회안에 바람이 불리 없건만 촛불이 꺼지고 십자가가 떨어진다. 사교계의 여왕으로 온갖 추문의 대상이 되는 나탈리아를 신도 질투한 것일까?

'난 당신을 사랑했답니다 / 때로는 두려움, 때로는 질투로 괴로워하면서도 / 나는 신이 당신으로 하여금 / 타인의 사랑을 받게 만든 바 그대로 / 진심으로 부드럽게 / 당신을 사랑했답니다.'

1829년에 쓴 푸시킨의 '당신을 사랑했어요'의 종장이다. 그는 비운의 죽음을 미리 예감한 것일까? 이 시를 처음 보았을때 나는 메모장에 아래와 같이 적었었다.

'시인은 바람이다. 바람은 우리가 갈 수없는, 먼 곳까지 가보고 싶어 한다.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하찮은 것들도, 속속들이 쓰다듬으며, 함께 슬퍼하고 울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것들은, 세상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그의 애정 어린 스침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바람은 항상 세상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