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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클래식이야기]악극의 창시자 바그너

2005-09-20     경상일보
 
19세기 전반부의 음악을 지배한 작곡가가 베토벤이었다면 후반부에 군림한 음악가는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였다.

바그너는 괴짜이기도 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자기 예술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인 사람이었다.

불행한 가정 탓인지 성격이 다소 삐뚤어진 바그너는 성장해서는 라이프치히 대학의 청강생이 되지만 1년도 못 채우고 불량학생으로 쫓겨났다.

여성 편력도 심했던 바그너는 첫번째 결혼에서 실패한 뒤 제자인 '한스 폰 뷜로'의 아내를 빼앗아 후처로 삼았다.

또 그는 정상 수입의 몇배나 되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전락, 파리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며 지독한 고생을 했다.

드레스덴 민중봉기가 일어났을 때는 혁명파에 가담해서 지명 수배자가 되어 스위스로 도피하는 등 그의 인생은 험난함의 연속이었다.

그 와중에도 취리히에 망명하면서 '미래의 예술작품', '가극과 희곡' 등 진보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장편 논문을 발표하며 '종합예술이론'을 펼쳤다.

그것은 희곡을 최고의 예술 형식으로 세우고 음악을 비롯한 다른 예술은 협력하고 융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논문들은 바그너의 작품이 '가극'이 아닌 '악극(Music drama)'으로 불리게 된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바그너의 악극 중에는 대작이 많았다. 특히 바그너가 63세 때 초연된 '니벨룽겐의 반지'는 총 3부작으로 전곡을 연주하는데에 무려 나흘이 걸렸으며 시간은 총 15시간 20분이나 소요되는 작품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음악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바그너는 음악의 진로를 바꾸어 놓을 정도로 갖가지 혁신을 일으켰다. 과대망상증에 가까운 자기 과시욕으로 적도 수없이 만들고 안하무인의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세계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할 의무가 있다. 나는 여러분이 스승으로 떠받들고 있는 바흐처럼 초라한 오르가니스트의 박봉으로는 생활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큰소리 치기도 했다.

바그너는 또 자신의 작품을 이상적으로 상연하기 위해 직접 치밀한 설계도를 작성하고 바이에른 국왕인 '루드비히 2세'의 후원을 얻어 '가극장'을 세우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다.

그곳에서는 바그너가 죽은 뒤 제 1, 2차 세계대전 때를 제외하고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바그너의 작품이 공연되고 있다.

지금도 해마다 8월이면 '바이로이트 바그너 축제'가 열리고 그의 주요 작품이 상연된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그 음악제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정기적으로 연주자들이 참가하고 있다.

악극작가, 작곡가로서 바그너가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오페라 작곡가 중에서 어느 누구도 직접 대본을 쓰는데 바그너를 따를 사람이 없었으며 광대한 표현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작품마다 독특한 감정세계를 깃들이게 했다.

또 독일음악의 선율, 화성 양식을 절정에 올려놓았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불가능을 가능케 한 바그너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낭만 시대의 거목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