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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개국 혁혁한 공 세운 신학성 장군

2005-10-11     경상일보
 
곽암(藿巖)(울산시기념물 제38호). '미역바위'라는 뜻이다. 울산시 북구 구유동 판지마을 바닷속에 있다. '양반돌', '박윤웅돌' '사암'이라고도 한다. 고려 왕건이 940년(태조 23년) 울산 호족 박윤웅에게 하사한 12개의 바위 중 하나이다.

그런데 박윤웅(朴允雄)은 누구인가. 울산 박씨의 시조이다. 박혁거세의 36세손으로 신라 하대 사람이다. 지금의 울산시 중구 반구동 구교마을에서 태어났다.

박윤웅에 대한 기록을 보자. '고려 때 (울산에는) 신학성장군(神鶴城將軍) 박윤웅이 있었다. 변통의 술수에 능하고, 주변을 토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태조(왕건)를 도와서 왕업을 이루는데 협조하였다.'<경상도지리지 울산군조>

'신라 효공왕 5년(901)에 신학성에 박윤웅이 터를 잡았다.'<울산박씨세보>

'신학성'의 원래 이름은 계변성이다. 그것이 신학성으로 바뀐 것은 신라 효공왕 때이다. '천복(天復) 원년 신유년(901)에 학 두마리가 금으로 된 신상을 물고 계변성(지금의 울산)의 신두산(지금의 학성)에 와서 울었다. 군인(郡人)들이 이를 이상히 여겨 신학성이라 불렀다'는 데서 생겨났다.

'전해오기를 (신라말에) 계변성에 천신이 학을 타고 신두산에 내려와 고을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주장했다'<동국여지승람울산군누정태화루>는 기록도 있다. 그러니까 계변성, 개지변, 신학성은 울산의 옛이름으로 학성, 울주, 울산과 동일한 명칭이다. 학성은 고려 성종 때 울산의 별호로 쓰여지기도 했다.

박윤웅은 이러한 울산지방의 토호였다. 학성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변통기술에 정통하고, 지역에서 독자적 군사력을 행사'했다. 다시 말해 박윤웅은 지금의 병영과 학성, 반구동 일대에 성을 쌓고, 군인(郡人, 지방민)들에게 신학성장군으로 불리면서 울산과 주변 일대를 주도적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박윤웅이 활동하던 신라 후대는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그런 와중에 귀족들의 반발로 신라 중기의 녹봉제가 신라 상대의 녹읍제로 바뀌었다. 녹읍제의 부활은 귀족 중심의 고대적 토지 지배와 수탈의 강화를 의미했다. 따라서 일반 평민들 사에서 불만이 증폭될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농민을 포함한 피지배 계급이 몰락을 겪는 등 농촌경제가 급속도로 붕괴돼 갔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은 마침내 골품제적 신분 질서에 바탕을 둔 신라 체제의 구조적 모순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각 지역을 중심으로 한 호족 세력이다. 이들 세력은 중앙권력의 통제가 약화되는 틈을 타 골품제 사회 전체를 부정하면서 독자적 지배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적 집단으로 급부상했다.

그런 가운데 사벌(지금의 경북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라 조정에서는 이를 진압하는데 실패했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반란사건이 잇따랐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 호족들이 여기저기서 군대를 일으켰다.

박윤웅도 그 무렵 울산지역에 존재했던 호족 세력이었다.

신라 경순왕 4년(930). 백제의 견훤이 자신의 고향인 가은현을 점령하려다 실패했다. 견훤은 이내 경상도 지역에 주둔한 고려군의 마지막 보루인 고창(지금의 경북 안동)을 공격하였다. 고려의 장군 유금필은 이곳을 사수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죽령을 넘었다. 그해 정월 재암성(지금의 경북 청송면, 진보면) 장군 선필이 군대를 이끌고 귀순해 왔다. 사기가 충천한 유금필의 군대는 고창과 병산 등의 싸움에서 잇따라 백제군을 격파했다. 그러자 영안(지금의 경북 안동군 풍산면), 하곡(안동군 임하면), 직명(지금의 안동군 일직면) 등 30여 군이 항복해 왔다.

그해 9월에는 동해안의 주와 군 부락 110여 성이 고려에 투항했다. 개지변의 우두머리 박윤웅도 그들과 함께 행동했다.

'9월에 나라의 동쪽 연해의 주군(州郡) 부락이 모두 태조(왕건)에게 항복했다.'<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경순왕 4년>

'2월에 신라의 동쪽 연해의 주군 부락이 모두 항복해 왔는데, 명주(溟洲)로부터 흥례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110여 성이었다. 9월에 개지변에서 최환을 보내 항복을 했다.'<고려사 권1, 세가, 태조 13년(930)>

신라의 수도 바로 아래 울산의 호족인 박윤웅이 부하 최한을 보내 투항함으로써 신라는 고려로부터 위 아래로 압박을 받게 됐고, 항복이 불가피해졌다. 박윤웅이 고려에 투항하자 울산은 명실공히 고려의 땅이 됐다. 후삼국 간의 싸움에서 승리한 고려는 박윤웅의 공적을 높이사 940년 역분전(役分田)을 실시할 때 그의 울산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 주었다.

'고려 때 군인(郡人) 박윤웅은 태조를 도와 고려국을 흥기시켰다. 그 공으로 동진현, 하곡현, 동안현, 우풍현, 임관군을 합하여 하사받았다. 그 이름이 흥려부(興麗府 혹은 흥례부 興禮府)이다.'<경상도지리지, 울산군>

박윤웅이 고려에 투항하기 전 울산은 동진현, 하곡현 등으로 분류돼 있었다. 그것을 태조(왕건) 23년(940)에 통합해 흥려부로 하고, 박윤웅에게 다스리도록 한 것이다.

이때 왕건은 박윤웅에게 식읍 700호를 하사하고, 정 5품 흥려백(興麗伯)에 봉했다. 강동과 농소지방의 채지(采地)와 12구의 미역 바위의 채암권도 주었다.

박윤웅은 고려 태조(918-943)가 나라를 세울 때 공울 세워 흥려백에 봉해졌다. '흥려'라는 말은 '고려를 흥성하게 하였다'는 뜻이다. 동진(東津, 지금의 농소, 강동)을 채지로 하사받았다.'<홍려승람>

박윤웅이 채암권을 갖게 된 미역 바위는 그후 울산박씨 문중에 의해서 관리됐다. 그러다 조선 영조 27년(1751)에 군역법이 시행되면서 균역사(均役使) 박문수의 건의에 따라 국가 소유로 넘어갔다. 그러나 문중에서 집요하게 요구해 3년만에 12개의 바위 중에 한개를 돌려 받았다. 이것이 '윤웅미역바위'이다. 1966년 문중에서는 이 바위의 유래와 소유권을 밝히는 비석을 미역바위가 있는 바닷가 판지마을에 세웠다. 1980년 문중은 곽암의 관리권을 어촌계에 위임했다. 어민들은 작황에 따라 매년 미역 10포기 안팎을 울산 박씨 종가에 박윤웅의 제수용으로 보내고 있다. 2003년 6월15일 울산박씨대종회는 곽암(藿巖)의 문화재 지정을 기념하고, 곽암 12구에 얽힌 내력을 기초로 박윤웅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정무공 박윤웅 곽암사적비'를 세웠다. 송수환 문학박사가 비문을 쓰고, 서예가 이권일씨가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