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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개발 산업 일군 경제인이자 과학자

2005-11-01     경상일보
 
이의립(李義立). 본관은 경주. 자는 예겸(禮兼). 호는 구충당(求忠堂). 신라좌명 공신 급량부대인 휘 알평의 후손. 부친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된 이영부, 모친은 경주 설씨. 1621년(광해군 13년) 5월18일 울주군 두서면 전읍리(옛날 경주부 남쪽 전읍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다. 5세 때 천자문을 읽고 7세 때에 '오포시(烏哺詩)'를 지었다. 조선시대 철을 생산할 수 있는 광산의 개발과 산업을 일궈낸 경제인이자 과학자로 생전에 "나라의 일에 병(兵)과 예(禮)보다 필요한 것이 없으며 솥과 농기구는 무쇠가 없으면 만들 수 없다"고 주장했다.

1630년(인조 8년) 10세 때 모친 설씨가 세상을 떠났다. 1635년 안동권씨(도사 벼슬을 한 계우의 손녀)와 혼인했다. 슬하에 극경, 극발, 극룡 등 세 아들을 두었다.

1640년 21세때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1642년 8월 상복을 벗고 탄식하듯 말했다.

"이제 양친께서 돌아가셨으니 효 대신 충(忠)을 하고자 하나 재주가 없다. 무예 조차 뛰어나지 못하니 충성도 여의치 않다. 생각컨데 나라의 큰 일로는 군사와 농사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그러나 조총에 쓰는 화약은 유황이 없으면 안되고, 농기구와 가마솥은 무쇠가 없으면 만들 수 없다. 이 모두 국내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것이라 밀무역꾼을 통해 외국에서 들여 와야 하는데, 발각이 되면 청일 양국으로부터 당하는 치욕이 참으로 크다. 이 땅에서 이것을 얻으면 나라의 위험을 미리 방비하는 것이 되니 충성의 길과 다름없다."

1646년 의립은 치술령에 올라 백일기도를 올리고 팔도강산을 답사했다. 가야, 금강, 묘향, 구월, 백두, 속리, 지리산 등을 답사했다. 태백, 소백산에서는 죽을 고비를 겪기도 했다. 1657년(효종8년) 경주와 울산의 경계인 울산 달래산(達川山)에서 무쇠(수철)와 경주 반척산 계곡에서 비상을 각각 발견했다.

1659년 무쇠와 비상의 제조법을 터득했다. 1660년(현종 원년) 각궁(角弓) 280통, 함석(咸錫) 1백근, 연철(鉛鐵) 1천근, 세면포(細綿布) 1백필, 철환(鐵丸) 73만개, 부정(釜鼎) 440죄를 만들어 훈련도감에 바쳤다. 그 공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됐다.

1669년 의립은 만호봉에서 유황광맥을 발견했다. 1671년 제조법을 터득하고 이듬해 2월 유황을 제조, 비변사에 바쳤다. 현종이 그 충정과 식견에 감탄해, '구충당'이란 호를 내리고, 수철이 나는 '달천'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했다. 1673년 의립은 숙천도호부사에 제수됐으나 사양했다. 현종은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와 함께 위로 3대에 걸쳐 증직(贈職)을 내렸다. 부인에게도 정부인(貞夫人)의 교지를 내렸다. 또 역군 180명을 주어 해마다 유황을 제조해 군수물품으로 충족케 했다.

1685년(숙종11년) 의립은 동생 계립에게 글을 보내 경주부 동쪽 효문동에다 구충당을 짓도록 했다. "늙어서 집에 들어가게 되면 어버이를 그리워 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심중에 더욱 간절할 터이니 문은 임금이 계신 곳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만들어라. 대청마루에는 난간에 오르면 부모님이 계신 고향산천을 바라볼 수 있게 하여 항상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함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9월 이곳으로 와 편액을 '구충당(求忠堂)'이라 붙이고, 임종시 까지 그 곳에서 기거했다. 1694년 3월12일 의립은 오시(午時)에 정침(正寢, 제사를 지내는 몸채의 방)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74세. 9월20일 월서동 선대의 묘소 아래 묻혔다. 1902년(고종39년) 맏손자 민구(旻久)가 옛묘터 밑 언덕에 무덤을 옮겨 장사지내고,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정자(正字) 벼슬을 지낸 최현필이 지었다.

현종이 하사한 달천광산은 이의립의 후손이 관리해 오다 일제때 경영권을 박탈당했다. 해방 후에는 대한 철광공사에서 경영권을 소유하기도 했다.

1910년 <구충당문집> 목판본이 단책(2권1책))으로 간행됐다. 의립의 유고본이 사후 216년이나 묻혀 있다가 세상 빛을 보게 된 것이다. 2000년 12월 국역<구충당 문집>( 구충당문집발행위원회, 이기형 국역)이 다시 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