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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까지 알려진 효행 울산인의 도덕규범

2005-11-08     경상일보
 
송도(宋滔). 조선초기 세종 때의 인물. 울산시 북구 효문동에서 출생했다. 생몰년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본관은 연안. 고려 1359년(공민왕 8년)에 홍건족 모거경(毛居敬)을 격퇴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책훈되고 연안부원군으로 봉해진 송경(宋卿)의 8세손. 부친은 침(琛)이다. 침은 종묘서(宗廟署) 령(令)과 문화현령(文化縣令) 등을 지냈는데 울산으로 생활터전을 옮겼다. 침의 장자인 현후는 성균관 진사였으나 관직으로 진출하지는 못했다. 송도 역시 울산에서는 처음으로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1428년(세종10년)에 효자로 정표됐다. 송도의 효심행적은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야승>과 울산의 각종 읍지에 기록돼 있다.

송도는 '고려말 조선 초기 성리학의 실천덕목인 <주자가례>를 행하고, <소학>을 필수과목으로 하는 생원시에 합격한 최초의 울산인'이다. 송도의 생원시 합격은 '고려말 상층 지식계층에 속하여 선진문화를 흡수했던 선대의 학문적 바탕'이 밑거름이 됐다. 성리학은 남송의 주자가 집대성한 신유학. 고려말에 원에 출입하던 관원들이 수용했다. <주자가례>는 주자가 편찬했다는 관혼상제례의 방법과 절차를 밝힌 책이다. 삼년상과 제사를 특히 중시했고, 이를 위해 선조의 신주를 모시는 가묘(家廟)를 설립하도록 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주자가례>를 실천한 선구자적 인물로 언양의 신계은, 정종문, 정상인과 함께 송도가 수록돼 있다. 당시 송도의 신분은 생원으로, 이는 울산지역에서도 성리학의 학풍이 나름대로 조성돼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생원시는 진사시와 함께 사마시라고도 했다. 여기에 합격한 자는 생원 또는 진사이다. 이들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과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사마시에 합격하면 학자나 지식인으로서의 공인된 지위를 보장받았다. 또한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면서 향촌에서 학식과 인품을 지닌 지도층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기도 했다.'(울산시사1 역사편) 생원시는 성균관에서 시행했으며, 성균관 대사성이 고시관으로 참여했다. 따라서 세종 초기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유학한 송도는 울산이 배출한 성리학적 소양의 선진자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송도의 연안 송씨 가문은 고려말에 외세의 침입을 격퇴시키면서 왕조를 지켜낸 훈신 가문이었다. 그러나 조선 왕조가 건국되면서 이성계 일파에 적극 협조하지 않아 퇴세하였다. 결국 <연안송씨대동보>에 기록돼 있듯이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등지로 낙향하게 됐고, 그중 송도의 부친은 울산으로 내려왔다.

송도는 어려움 속에서도 훈신(勳臣) 가문 출신이라 전통적인 가학(家學)과 향교를 통해 학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성균관 유학중 부모의 연이은 사망으로 학업을 중도에서 포기했기 때문이다. 송도는 '부모를 위하여 전후 6년간 노막(盧幕)에서 시묘하면서 불교식 상제례를 행하지 않았다. <신동국여지승람> 울산군 인물조에 "이 일이 알려져 나라에서 정려(旌閭)했다"고 기록돼 있다. <신중동국여지승람>은 종전의 지리지와는 달리 인물조를 대폭 늘려 효자와 열녀를 새로 수록하고 있다. 책이 편간될 때까지 정표된 효자와 열녀는 600여명에 이른다. 송도가 이 정선된 인물군에 포함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송도의 효행은 <세종실록>, <신동국여지승람>, <대동야승>에 비교적 간략하게 실려 있다. 이들 기록은 1481년(세종 10년) 전국적으로 시행한 효자, 순손, 절부의 정표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예조가 서울과 지방의 효자, 순손, 절부를 찾아 아뢰었다. 울산사람 생원 송도는 부모가 모두 오래전부터 병을 앓았는데 10여년이나 약을 달이면서 보살폈다. 부모가 1년을 간격으로 연달아 돌아가시니 몸소 흙과 돌을 져다 날라 분묘를 지었다. 상례의 제도를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따르고 불교식 예법을 따르지 않았다. 사당을 세워 신주를 모시고 새벽마다 향을 피우면서 배알하였다. 그리고 때에 맞추어 제사 지내고, 새로운 먹을 것이 있으면 모두 부모의 신주에 바쳤다.'(가라문화, 제14집)

송도의 효행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조선 후기 1832년(순조32년)에 간행된 <울산부읍지>에 기록돼 있다.

'송도는 생원이다. 평소에 학문과 행실이 뛰어났고, 부모를 섬기는데 정성을 다했다. 부친이 병으로 소경이 되어 사물을 보지 못하였는데, (송도가) 과거에 합격하고 돌아와 이 소식을 전하니 갑자기 두 눈을 떴다. 모친이 병이 들어 물고기 회를 먹고 싶어 하였으나 가난하여 봉양해 드릴 수가 없었다. (고기를 구하기 위해 연못에 나가) 얼음을 두드리며 소리내어 우니 붕어가 얼음 위로 뛰어 나왔다. 제사에 임하여 제수를 구하니 산꿩이 날아들었다. 6년간 여막에서 시묘하며 불교식 상자례를 행하지 않았다. 이 일이 알려져 정려되었다.'(가라문화 제14집)

<울산부읍지>에 실린 송도의 이 같은 행적은 울산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송도의 효행을 수령이나 향리가 직접 방문하여 사실을 확인하고 예조에 보고한 것이다. 이 기록은 다시 중앙에 보고되고, 중앙정부에서 이를 토대로 읍지를 편찬했다. 내용 중에 기이한 것이 있으나 비현실적이라 할 수 없다. 송도의 효행에 감탄하고 이를 귀감으로 삼으려는 당시 울산지역 백성들의 마음이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송도는 울산 최초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부모에 효도했으며, 향토의 성리학적 문풍과 교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무엇보다 조선 초기 문화의 불모지대나 다름없었던 울산에 성리학적 학풍의 진작과 덕목 교화에 선구자적 업적을 남겼다. 덕분에 울산인의 도덕과 사회규범의 모범으로 인식되어 추앙을 받고 있다.

송도의 효심은 중국에 까지 알려져 명나라 신종으로부터 어제시(御題詩)와 홍문(紅門)을 하사받았다. 이 같은 효심을 기리는 '효자송도선생정려비'(울산시유형문화제 제10호)와 정려각이 중구 우정동에 세워져 있다. <연안송씨대동보>에 따르면 이 비는 송도의 후대 손이 1737년(정사년, 영조13년)에 세웠다. 비에는 '석비가 옛날에는 부의 동쪽 백련암에 있었으나 정사년 봄에 서쪽 강정리 연지방(蓮池坊)에 이건하였다' '구비(백련암에 세운비)가 임란 중에 파손되어 한 조각만 남아 옛터에 이를 묻었고, 기미년과 임진년에 양비를 신비의 좌우에 묻었다'고 기록돼 있다.

정려각에는 송도의 효행에 관한 글이 새겨진 현판이 부착돼 있다. 임진왜란후 송도의 효심을 전해 들은 명의 신종황제가 '조선의 대표적 인물로 장수로는 이순신, 곽재우, 효자로는 송도, 박효랑(숙종 때의 효녀 박문랑)을 꼽았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송도의 효행을 중국 진나라 시대의 효자인 왕상(王祥)과 견주면서 홍문을 하사하고, 시를 짓는 한편 가제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연안송씨대동보>의 <성균생원효자공유사>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송도의 효행내용은 윤색된 부분이 없지 않으나, 효행정신은 지금도 면면이 이어져 지역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교육되고 있다. 북구 효문동이라는 지명이 송도로 해서 생겨났다. 중구 우정동의 정려비 외에 북구 효문동 효문초등학교에 '효자성균생원연안송공단비', 남구 신정 1동에 '봉월정사'(원래 효문단)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매년 선생 정신과 넋을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