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카지노

[인물산책]김홍조

2005-11-22     경상일보
 
 
인재양성과 대한독립 위해 살다간 선각자


'김홍조(金弘祚). 자는 경옥(景玉). 호는 추전(秋田). 본관은 금령(金寧).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금령군(金寧君)으로 봉한 김시흥(金時興)의 25세손이자 사육신중 하나인 백촌 김문기의 16세손.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김형복, 아버지는 선공감 가감역을 지낸 김규한(金奎瀚). 1868년(고종5년) 1월18일 울산 반구동 서원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선 말기에 관직생활을 시작, 이후 개화운동에 투신했다. 부산에서 사업을 일으켜 거부가 됐다. 인재 양성을 위해 국내외 유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하고, 금융에 참여해 독립자금을 조달했다. '경남일보' 창간, '동아일보' 발기에 참여했다. 이시영이 운영하던 독립군 양성기관(만주의 신흥무관학교)과 박상진 의사의 대한광복단을 지원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이 됐다. 1922년 7월20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55세.

1885년(光緖11년) 김홍조는 문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김홍조는 이 무렵을 전후로 김옥균, 박영효, 이규환 등 개화파와 접촉했다. 1890년(고종27년) 무과에 다시 지망, 12월에 병과(丙科)에 합격하여 병선장(兵船將)이 됐다. 1891년(고종28년) 7월 김홍조는 어모장군(禦侮將軍)의 품계를 지닌채 경상좌도병마우후(慶尙左道 兵馬虞侯)가 됐다. 우후는 조선시대 각 도에 배치된 병마절도사 및 수군절도사 다음의 무관직이다. 김홍조는 울산 병영에 부임하자 백성을 보살피고, 병사들을 도와 병영의 각종 병폐를 개선했다. 이에따라 백성들사이에서 덕망이 있는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덕분에 1894년 경상좌도병마우후에 재임명 됐다. 1895년 을미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직에 올랐다. (이후 통정대부의 품계를 가지고 일본 등지를 왕래하면서 자유로운 몸으로 개화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1897년(고정34년) 함경, 평안도 초토사(招討使)에 임명됐으나 이를 사양했다. 그대신 나라를 일으키는 길이 인재양성에 있음을 통감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제들을 가르치는 일부터 시작했다.

김홍조는 1900년(고종37년) 5천원을 출자하여 염직공장 기술자 10명을 양성하는데 충당했다. 이듬 해에는 2만2천원을 들여 일본 동경 상업학교에 유학한 조선인 학생 17명의 학비를 부담했다. 김홍조의 이같은 장학사업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확대됐다. 외국의 경우 일본 도쿄(東京)와 히로시마(廣島), 국내의 경우 서울, 부산 등지로 유학생을 보냈다. 도쿄 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교육자, 반공운동가로 활약한 박관수(朴寬洙) 같은 이가 그때 유학의 혜택을 받은 울산의 동량이다.

김홍조는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사업 외에 선각자로서 개화사업에도 뛰어 들었다. 학교와 교량, 도로, 잠농, 수리, 사찰에 이르기까지 출연한 금액이 14만1천6백여원에 이르렀다. 곤궁하거나 딱한 처지에 놓인 친족이나 향민 구제에도 나섰다.

1907년(광무11년) 6월25일 김홍조는 통정대부의 품계를 지니고 있으면서 비서감승(秘書監丞)에 등용됐다. 그러나 김홍조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 무렵 김홍조는 부산을 중심으로 목재사업에 전력을 쏟고 있었다.

1908년 구포를 중심으로 한 구포저축주식회사(구포은행의 전신)가 설립되자 김홍조는 70여명과 함께 주주로 참여했다. 1915년 구포은행 본점을 부산으로 옮기면서 경남은행으로 개편 설립됐다. 김홍조는 여기에도 참여했다. 경남은행은 당시 해외 및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자금의 주 공급처였다. 1928년 대구은행과 합병, 경상합동은행으로 영업하다가지금의 조흥은행으로 발전했다.

김홍조는 경남은행에 관여하던 시절 울산출신의 박상진 의사가 이끄는 대한광복단 비밀요원으로 활동하면서 군자금을 납부하는 등 적극 협력했다. 1912년 이시영이 운영하던 만주의 신흥강습소가 신흥무관학교로 확장돼 본격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김홍조는 이 시영을 도와 신흥무관학교에 운영자금을 지원했다.

1914년 안희제가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열었다. "구국운동도 결국은 경제문제가 선결돼야 가능하다"는 인식하에 독립운동을 지원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백산상회는 5년 뒤 백산무역주식회사로 개편됐다. 김홍조는 개편작업에 참여했으나 직접적인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극비리에 상해로 들어가 임시정부 이시영을 방문, 헌금을 내 놓고 귀국했다.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에는 '항일운동이 각 방면에 걸쳐 확대되어 가자 송진우, 김성수, 신익희, 조소앙, 장덕준, 김병로, 김홍조 등의 내왕이 빈번했다'고 적혀 있다. 이렇듯 김홍조는 당시의 저명인사들을 접촉하면서 독립에 적극 관여하고 있었다.

1921년 8월 중국 상해에서 한국독립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가 조직됐다. 11월11일 위싱턴에서 열린 회의에 이승만, 김규식이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국내 애국지사 327명이 서명한 장문의 건의서가 제출됐다. 철저한 불교 신자였던 김홍조는 불교진흥회 대표로 서명하여 한국독립 청원에 일조했다.

1922년 7월20일(음력) 김홍조는 세상을 떠나 학성공원에 묻혔다.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한토막의 기사가 실렸다. '경남 울산읍내에 사는 김홍조씨는 신병으로 오래 신음하던 중 10월에 드디어 이 세상을 떠났는데, 씨는 일찍이 일본에 망명하였던 김옥균, 박영효씨 등 국사범을 위하여 많은 동정을 하였으며, 그후 귀국하여서는 경남일보, 경남은행 등에 관계하는 동시 교육계에도 많은 힘을 기울여 덕망이 많던 55세로 그만 세상을 떠났다'

1928년 학성공원에 김홍조 공덕비가, 1939년 묘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박영효가 지었다. 김홍조는 선각자, 실업인, 언론인, 금융인, 독립가로 활동하면서 인재양성과 대한독립을 위해 살다 갔다.

또한 반상의 차별 철폐, 종의 폐지와 해방, 적자와 서자의 차별철폐, 의복개량과 색옷 장려, 자작농 육성, 교육권장 등 6개의 신조를 천명하고 스스로 실천하는 시범을 보였다. 그 뿐이 아니다. 선을 베푸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길흉사나 춘궁기, 혹은 명절 때 어려운 이웃을 진심으로 도왔다. 지역에 다리를 놓고, 수리시설을 하고, 농잠을 장려했다.

1913년 신학성(학성공원)에 땅 7천여평을 사들여 흑송, 벚꽃, 매화 등을 심고, 가꾸어 훗날 이를 울산면에 기증했다.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산 11번지 작천정 일대의 임야를 사들여 언양사회에 기증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다. 이시영은 부통령에 오르자 1951년 4월 김홍조 묘소에 참배하기 위해 울산을 찾았다. 김홍조의 묘는 1980년대 초 남구 옥동 공원묘원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