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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산책]박상진

2005-11-29     경상일보
 
 
국내 항일운동사 큰 획 그은 독립운동가



박상진(朴尙鎭). 독립운동가. 자는 기백(璣伯). 호는 고헌(固軒). 본관은 밀양. 1884년 (고종21년) 12월7일(음력) 경남 울산 송정에서 승지 시규(時奎)와 여강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지 100여일 만에 큰 아버지 교리 시룡(時龍)의 양자로 입양됐다. 그후 양부모가 계신 경주 녹동과 생부모가 계신 울산 송정을 오가며 성장했다. 태어난 곳은 북구 송정동, 성장한 곳은 경주시 외동면 녹동 469번지이다.

어린시절 박상진은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1898년 15세 되던 해에 경주 최부자로 알려진 월성 최씨댁 처녀 영백(永伯)과 결혼했다. 이듬 해에 당시 학식이 높던 왕산 허위(許蔿)의 문하(흥구의숙)에 들어가 수학했다. 정치와 병학을 배우고, 충신열사의 전기 등을 탐독했다. 허위 선생을 만나러 진보에 온 경북 영해군 남면(영덕군 죽산면) 출신의 평민의병장 신돌석과 의형제를 맺었다.

1905년 박상진은 허위의 권유로 양정의숙 전문부에 입학해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해 11월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다. 그러자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유명한 사설을 썼다. 시종무관 민영한이 비분강개해 자결하는 등 수 많은 인사들이 목숨을 끊었고 이완용등 을사오적( 五賊)을 참살하자는 '오적참살결사'가 조직됐다. 1906년 의병이 봉기했다. 박상진은 경주 녹동의 가솔들을 서울로 불러올렸다.

1908년 스승 허위가 고종황제의 의거밀명을 받고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돼 포살형을 당했다. 충격을 받은 박상진은 향리인 경주 녹동으로 내려와 잠시 머물렀다 다시 상경하여 훗날 대한 광복회 부사령관이 되는 김좌진을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

1909년 박상진은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에 판사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했다. 1910년 9월1일 박상진은 식솔들과 함께 경주 녹동으로 낙향했다.

1910년 일제는 기업의 설립을 총독의 허가제로 한다는 회사령을 공포했다. 회사령은 이듬해 1월1일부터 시행됐다. 1912년 박상진은 가산 중 논밭 900여 두락을 저당잡혀 빌린 자금으로 대구에다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라는 곡물 상회를 차렸다. 이 상회는 곡물 거래 외에 독립운동가들의 연락 거점과 자금 조달처로 이용됐다.

박상진은 이 무렵 세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만주와 연해주, 중국의 신해혁명 현장을 둘러 보고, 상덕태상회의 해외지점 개설을 위해서였다. 손문이 주도한 신해혁명 현장에서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13년 손문을 적접 만난 이후 박상진은 독립운동에 적극 매진했다. 1913년 경북 풍기에서 광복단이, 1915년 초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이 조직됐다. 1915년 7월 대구에서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들이 만나 두 단체를 통합,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박상진을 총사령에 임명했다.

대한광복회는 국권회복과 공화제 실현을 목적으로 한 항일독립운동 단체이다. 1916년 김좌진 등 새로운 인물들이 참여했다. 이 해 대한광복회는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암살하기 위해 기회를 노렸으나 데라우치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6년 9월 대구의 친일거부 서우순에 대한 모금 사건(일명 권총사건)에 휘말려 최명규, 김진만, 김재열, 정운일, 김진우, 홍우일, 이시영 등이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문 끝에 재판에 회부돼 형을 살았다. 박상진도 권총제공 혐의로 체포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17년 대한광복회는 기호지방의 애국지사와 관동지방의 지사들이 참가, 명실상부한 전국 조직으로 확대됐다. 박상진은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전국의 부호들에게 재산에 비례한 군자금의 의연을 통고하고 군자금 조달에 주력했다.

대구의 상덕태상회, 영주의 대동상회, 광주, 삼척, 예산, 인천, 용천, 서울, 해주 및 만주 안동 장춘에 설립된 곡물상, 잡화상을 연락 거점으로 하여 군자금을 모으고, 친일부호 처단, 독립군 양성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군자금 조달은 쉽지가 않았다. 도리없이 친일 부호들과 금광, 세금수송 우편마차를 공격하기로 했다.

박상진은 군자금 조달을 거부하는 벌교의 서도현, 보성 박곡의 양재성, 칠곡의 장승원 등 친일 부호들을 차례로 처단했다. 1917년 11월 채기중, 유창순, 임봉주, 강순필로 하여금 칠곡부호 장승원을, 1918년 1월 김한종, 장두환, 김경태, 임봉주로 하여금 아산면 도고면장 박용주를 처단토록 했다.

경북 칠곡의 장승원 처단 후 붙여 놓음은 광복회 고시문과 도고면장 박용하 처단후 붙여 놓은 사형선고문으로 해서 일본 경찰이 발칵 뒤집혔다. 광복회와 광복단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할 경우 거액의 현상금을 지급한다는 벽보도 나붙었다.

1918년 2월1일 박상진은 생모의 출상 하루 전날 장례에 참석했다가 장승원 처단의 주범이라는 이유로 체포됐다. 경주수비대 수백명이 녹동 상가를 급습하였던 것이다.

이무렵 대한광복회는 전국 조직망이 발각돼 주요 인물이 검거되고, 사형당해 조직이 대부분 파괴돼 있었다. 충청지부장 김한종,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충청지부 단원 장두환, 황해지부장 이관구 등이 체포됐다. 그러나 전라도의 광복회원들은 친일부호들을 찾아가 처단하는 등 끈질기게 일제에 저항했다.

경주 수비대로 끌려간 박상진은 공주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일제는 1919년 2월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을 때까지 무려 14개월이나 박상진을 고문했다.

고문을 하면서 대한광복회에 활동자금이나 군자금을 헌납한 민족자본가와 애국지사의 명단을 내 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박상진은 그러나 고문과 고통 속에서도 동지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1919년 9월26일 경성복심법원 형사부는 박상진 등의 사건을 대구복심법원으로 이첩했다. 박상진과 함께 재판을 받던 광복회원들도 대구 형무소로 옮겨졌다. 1921년 8월11일 박상진은 대구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돼 순국했다.

1960년 북구 송정동 생가가 있는 지역의 인사들이 모여 박상진추모시업회를 발족, 학성공원에 대한광복회 총서령 박상진의사 추모비를 건립했다. 천안에도 광복회기공비가 세워졌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울산청년회의소는 매년 8월15일 중구 북정동 북정근린 공원에 있는 박상진 동상과 추모비 앞에서 추모제를 열고, 묘소 참배를 하고 있다. 경주군 외동읍 녹동리에는 박상진이 성장한 유허가, 경주군 외남면 노곡에는 묘소가 있다. 북구 송정동 생가는 울산시에 의해 복원(지정문화재 5호)됐다. 사단법인 박상진의사 추모사업회에서 1996년 5월15일 전기 <한의 독립투사-고헌 박상진>(집필 김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