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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산책]고복수

2005-12-20     경상일보
 
'타향살이'로 망국의 한 달랜 국민가수



고복수(高福壽). 민족 항일기부터 1970년대 초까지 활약한 울산출신의 가수. 1911년 2월10일 울산군 하상면 서리(울산시 중구 서동) 21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 가수 황금심과 사이에 장남 영준(가수) 등 3남2녀를 두었다.

고복수는 울산출신의 국민가수이다. 이 나라의 대중가요사를 얘기할 때 결코 그를 피해갈 수 없다. 일제 치하에서 백성들은 '타향살이 몇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년에 청춘만 늙고'(1절)로 시작되는 <타향살이>를 따라 부르면서 나라 잃은 설움과 한을 삭혔다. 당시 <타향살이>가 인기를 끈 것은 노랫말 속에 담긴 실향의식 때문이다. <타향살이>를 듣고 자살하는 사람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고복수는 고향에서 병영초동학교(일신보통학교)를 4학년 때까지 다녔다. 그후 5학년 초에 부산의 내성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집안의 어려운 처지를 잘 알고 있던 외삼촌 조경술씨가 가족들을 부산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부산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고복수의 아버지는 병영초등학교 입구의 길목에서 국수가게를 운영했다.

유년시절 고복수는 무척 성숙했다. 성적은 크게 뛰어나지 않았으나 정서가 풍부하고 인정이 많았다. 또래의 아이들과 극단을 만들어 교과서에 실린 내용들을 무대에 올리곤 했다. 마을에 있는 디딜방아간이 단골 간이 무대였다. 교과서 내용을 신파극으로 바꾸는 일과 소도구, 배역 등을 정하는 일은 언제나 고복수의 몫이었다.

1920년대 전후는 전국적으로 신파극단의 공연이 활발했다. 병영의 유학생들도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면 음악회를 열었다. 병영초등학교 근처의 청년회관이 행사 장소로 이용됐다. 청년회관은 병영 주민들에게 있어서 의사소통의 장소였다. 사회의 돌아가는 얘기나 마을의 길흉사, 경연 등이 이 곳에서 전파됐다.

어느 해 여름이었다. 청년회관에서 음악대회가 열리고, 고복수는 모처럼 자신의 노래솜씨를 뽑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고복수는 <희망가>를 불렀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할 일이 무엇이뇨,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니 이 아니 족할까.' 고복수가 노래를 하는 동안 관중석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노래가 끝나자 비로소 여기 저기서 칭찬의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1932년 고복수는 콜롬비아가 주최하고 조선일보사가 후원한 전국 신인가수선발대회에 출전했다. 신인가수선발대회는 레코드 취입 가수를 뽑는 대회로 당시만 해도 극단의 인기배우나 기생들이 주로 참가했다. 전국 9개 지방 도시에서 예선대회가 치러졌는데 고복수는 부산대회에서 1등을 했다. 고복수는 서울에서 열리는 본선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아버지가 경영하는 잡화상에서 거금 60원을 훔쳐 서울행 기차를 탔다. 본선 대회는 치열했다. 현재명, 안기영(또는 김교성, 김준영, 안기영이리는 설도 있음) 등 쟁쟁한 음악인들이 심사위원으로 초청됐다.

고복수는 <비련>(지정곡)과 <낙화유수>(자유곡)를 불러 2등에 입상하고, 동아일보가 주관한 '당선자 발표음악회'에 초청됐다. 고복수는 <서울의 노래>, <소쩍새 우는 밤>을 불렀다. 그것이 그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마침 행사장에 와 있던 오케이 레코드사 이철사장의 눈에 띄어 즉석에서 레코드 취입을 제의받은 것이다.

1934년 12월 고복수는 A면에는 <이원애곡>, B면에는 손목인 작곡의 <타향>(후에 '타향살이'로 개칭)을 머리곡으로 하는 레코드를 취입했다. 레코드는 발매되자 마자 엄청나게 팔려 나갔다. 특히 <타향>이 인기였다. 단숨에 5만장을 넘어서자 오케이레코드사에 비상이 걸렸다. 고복수는 이철 사장으로부터 1천원의 축하금을 받았다.

1935년 고복수는 <고독의 꿈>, <오 새벽이로다>, <희망의 언덕>, <사막의 한>을 취입해 발표했다. 제 2의 히트곡인 <사막의 한>에 이어 1937년 가수로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혀 준 <짝사랑>도 연이어 발표했다. 전속가수 이난영과 함께 고복수는 오케이레코드사의 보증수표이자 달러 박수였다.

1939년 고복수는 <알뜰한 당신>의 가수 황금심과 결혼, 장안의 화제가 됐다. 고복수는 황금심 보다 10살 위로 서을 근교 신흥사에서 사랑을 고백해 그녀를 평생의 반려자로 삼게 됐다. 당시 황금심은 박단마와 함께 가요계의 쌍벽을 이루면서 빅타 레코드사의 전속 가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1941년 태평양 잔쟁이 최악으로 치닫자 일제 치하의 모든 문화활동이 통제받았다. 1943년 이후 레코드 산업 역시 침묵기를 맞았다. 모든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일제는 성전 완수를 독려하고, 산업전사 위문공연이라는 것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고복수는 황금심과 함께 눈물의 여왕 전옥이 이끄는 남해위문대에 소속돼 전국 전국의 농촌이나 공장, 탄광 등지를 순회하며 공연했다. 고복수는 광고판을 둘러메고, 황금심은 꽹과리를 두들겼다. 그러나 생활은 예전 같을 수가 없었다.

1945년 광복 직후 고복수는 인천 애관극장의 백마가극단 간판 스타로 활약했다. 또한 전옥이 주관하던 백조악극단의 주요 단원으로도 활약했다. 1950년 6.25 때 괴뢰군에 붙잡혀 의용군에 강제 입대됐다. 그 해 늦가을 국군에 구출돼 군예대에 편입, 가수로 활동했다. 1958년 초가을 고복수는 서울 명동 소재의 전 국립극장 무대에서 가수생활 25주년을 마감하는 은퇴공연을 가졌다. 그 날 고복수는 부인 황금심과 함께 <부부의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1959년 고복수는 서울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자리) 5층에 동화예술학원을 개설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학원을 경영했다. 이미자, 안정애 등의 인기가수가 이곳에서 배출됐다. 1960년 극영화 <타향살이>를 제작했다. 인기스타 이민과 황해, 여배우 이경희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광화문 네거리에 있던 국제극장에서 개봉됐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그후 서적외판원 생활을 하는 등 생활고에 시달렸다.

고복수가 생전에 고향 땅 울산을 밟은 것은 <타향살이>를 발표하고 두 해쯤이 지나서였다. 1960년대 중반에도 한 차례 울산을 방문, 중구 학산동 시민관(흥국생명 자리)에서 공연을 가졌다.

1972년 2월12일 고복수는 연세대 의료병원에서 지병인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1세. 장래식은 사단법인 한국연예협회장으로 <타향살이>의 구슬픈 가락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치러졌다.

1987년 11월28일 사후 15년 만에 고복수의 예술혼을 기리는 '제1회 고복수 가요제'가 울산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그후 4년뒤인 1991년 10월17일 중구 북정동 동헌 간물 앞 화단에 고북수를 기리는 '고복수 노래비'가 세워졌다. 홍익대 김진성 교수가 노래비를 제작하고, 서예가 김경욱이 글자를 썼다.

2001년 7월30일 황금심이 서울 당산동 자택에서 숙환(파킨슨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세. 신춘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