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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산책]오영수

2005-12-27     경상일보
 
고향의 서정 읊은 한국 단편문학 대표주자



오영수(吳永壽). 호는 월주(月州), 난계(蘭溪). 본관은 해주(海州). 1909년 울주군 언양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오시영과 어머니 손필옥 사이에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 때 오영수의 출생일이 1914년(혹은 1911년) 2월11일로 알려졌으나 이호종이 '난계 오영수론'에서 호적부에 '명치 42년(1909년) 2월11일'인 것으로 밝혀졌다.

1917년 서당 세심원에서 육개월 가량 수학했다. 1920년 4월1일 언양공립보통학교(지금의 언양초등)에 입학했다. 일학년에서 특별히 배울 것이 없어 이학년 과정을 공부했다. 집안이 어려워 공부룰 하면서 당시 김기오(훗날 <현대문학> 초대이사장)씨가 운영하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지국에서 배달, 우송, 수금업무를 맡아 일했다. 한 달에 오십전을 받아 십오전은 월사금으로, 나머지는 집안 살림에 보탰다.

1926년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 무렵, 학교장의 추천으로 우체국의 견습공으로 취직해 잠시 근무했다. 1932년 일본 오사카(대판, 大阪)의 나니와 중학 교 속성과를 수료했다. 1935년 일본대학 전문부에 적을 두었으나 '부친별세'의 거짓 전보를 받고 급히 귀국했다. 오영수는 교사인 김정선(金貞善)과 결혼했다.

1938년 장녀 숙희가 태어났다. 1939년 오영수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국민예술원을 졸업했다. 1940년 차녀 국이 태어났으나 2년 뒤에 사망했다.

1943년 일본에서 돌아와 양산군 일광면 화전리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 김범부 선생을 만나 그의 동생 동리를 앓게 됐다. 장남 철이 태어났다. 1944년 부친이 타계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 후 경남여고에서 미술교사로 교편생활을 시작했다. 1946년 차남 윤(潤)이 태어났다. 1947년 장남 철이 사망하고, 1948년 삼남 건이 태어났다.

1949년 단편소설 '남이와 엿장수'(뒤에 '고무신'으로 개제)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입선되고, 1950년 단편 '머루'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이 해에 오영수는 청마 유치환 등과 함께 동부전선(제3사단 22연대) 종군작가로 나섰다. 1951년 부산시 동구 수정동 664로 이사했다. 차녀 영아가 태어났다. 오영수는 부산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554년 조연현과 함께 문예지 <현대문학> 창간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아우 오생근의 집에 머물렀다. 1955년 평론가 조연연씨가 주간(실무책임자), 오영수가 편집장을 맡아 1966년까지 일했다. 1955년 단편소설 '박학도'로 제1회 한국문학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속, 낙향산고>에 당시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서울서 삽십년, 옆눈 한번 팔지 못하였다. 자신을 위해 택시를 타지 않았고, 양담배 한갑 산 적이 없었다. 친구들과 점심 한끼를 떳떳이 사보지 못하였다. 주간은 아침에 잠깐 들렀다가 딴 직장으로 가버리면 종일 사무실을 지켜야 했다. 실례지만 문단 거지들과 지방 문인들의 시중까지 그 알량한 월급으로 감당을 못해 원고료를 쬐끔 협잡을 해서 문인 거지들과 지방문인들의 찻값에 보태기 위해 아무도 몰래 서랍에 넣어두고, 반품을 표지만 뜯어버리고 휴지로 팔아 충당하기도 하였다.'

1957년 서울 성북구 돈암동 250번지로 이사했다. 1959년 단편소설 '메아리'로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1963년 서울 도봉구 우이동 골짜기로 이사했다.

1966년 지병(위궤양)으로 현대문학사 실무에서 떠나 이듬해 수술을 받았다. 1968년 한국문학가협회 소설분과위원장, 1970년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위원장에 피선됐다. 1974년 서울 도봉구 쌍문동 486번지로 이사횄다. 지병이던 위궤양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회생하면서 아호 '월주'를 '난계'로 바꾸었다.

1977년 3월15일 오영수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울주군 웅촌면 곡천리로 낙향했다. 대숲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시골집을 하나 구해서 구둘을 고치고, 도배를 하고, 대를 쪼개어 사립문을 얽어 달았다. 그리고 그 집을 침죽제(枕竹齊)로 명명했다.

침죽제에서 생활하며 오영수는 부산과 울산의 제자들과 문인들이 찾아 오면 기꺼운 마음으로 함께 어울렸다. 추어탕집으로 문우들을 데려가기도 하고, 막걸리를 주거나 받거니하면서 문단 아팎의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윤정규, 최해군, 구본룡, 윤진상, 정종수 등 부산의 문인과 김영진, 이재기, 서상연, 김성춘, 신필주 등 울산의 문인들이 침죽제를 자주 찾았다. 오영수는 생전에 낚시와 난을 특히 좋아했다. 침죽제 앞의 도로를 건너면 술도가가 있고, 그 아래 소롯길을 따라 내려가면 회야강이 나타났다. 오영수는 그 화야강 주변 바위나 풀숲에 터를 잡고 앉아서 낚시를 드리웠다.

오영수는 대숲에 비가 내리는 밤이면 만돌린을 켜면서 대중가요 <고향초>와 <울릉도 뱃사공>을 애수어린 목소리로 노래했다. 1979년 <문학사상>(1월호)에 발표한 '특질고'를 발표했다. <특질고>는 우리나라 각 지방의 방언과 지방색의 특질을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이 글로 해서 한국문인협회로부터 제명되는 등 뜻하지 않은 필화사건에 휘말렸다. 이 해에 <월간문학>(2월호)에 마지막 작품인 편지를 발표했다.

오영수는 특질고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짐짓 초연한 자세로 사태의 심각성을 속으로 삭였다. 그러는 가운데 충격의 여파가 깊어져 지병인 위궤양이 다시 악화됐다.

대바람소리가 유난히 화사하던 날 밤, 오영수는 아들과 제자가 두는 바둑을 말없이 지켜 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인 1979년 5월15일 오영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71세. 오영수는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선산에 묻혔다.

1983년 5월15일 울산문협(지부장 서상연)과 부산소설가협회는 공동으로 오영수의 무덤가에 '작가 오영수 여기 잠들다'라고 적은 묘비를 세웠다. 1992년 10월30일 오영수문학비건립위원회는 울산문화원 뜰(지금의 남구문화원)에 '오영수 문학비'를 건립했다.

1993년 5월15일 지역일간지 울산매일이 오영수의 문학정신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오영수문학상>을 제정하고, 매년 전국의 작가를 대상으로 수상자를 선정해 시상을 해오고 있다. 1996년 '문학의 해'를 맞아 언양초등학교 총동창회는 교정에다 동문 소설가를 기리는 '오영수문학비'를 세웠다. 1999년 소설가 이재인(경기대 교수)은 오영수의 소설미학과 삶을 탐구한 연구서 <오영수문학연구>(문예출판사)를 펴냈다.

오영수는 전형적인 단편 작가로 한국적인 소박한 인정이나 서정의 세계에 기조를 두고 있는 작품들을 창작했다. '화산댁이'(1952), '윤이와 소'(1952), '코스모스와 소년'(1953), '갯마을'(1953), '박학도'(1955), '여우'(1957), '후조'(1958), '명암'(1958), '메아리'(1959), '은내골 이야기'(1961), '수련'(1961), '실걸이꽃'(1968), '어린 상록수'(1975) 등 150여 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머루>(1954), <갯마을>(1956), <명암>(1958), <메아리>(1960), <수련>(1965), <황혼>(1976), <잃어버린 도원>(1978) 등의 창작집과 <오영수전집>(1968), <오영수대표작선집>(1974)이 있다. 1955년 한국문학가협회상, 1960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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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오영수문학비. 1992년 10월30일 오영수문학비건립위원회가 남구문화원 뜰에 건립(왼쪽) 했으며, 1996년 모교인 언양초등 교정에 이 학교 총동창회가 동문 소설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