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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 산길서 맞닥뜨린 황악 산세에 "악"

2006-03-08     경상일보
 
질매재 터널을 지나자 곧 오른쪽으로 형형색색의 시그널이 나무가지에 꽃처럼 피어있다. 대간 진입로 표식이요. 앞선 사람의 흔적인 셈이다.

'본래 땅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간 사람들이 많아지며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근세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 노신의 말이다.

세상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 길 역시 많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모여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삶'을 풀어쓰면 '사람'이 된다. 사람이 걸어간 길(路)이 삶이기 때문이리라.

#길은 없었다 그냥 사람들이 걸었을 뿐이다

산도 그렇게 길을 내어 만나고 헤어지며 사람들을 불러 들였던 것이다.

설령 잘못된 길이 지도(地圖)를 만들지라도 불평하지 않고 그 길의 쓰임이 끝날 때까지 손을 내밀고 기다려 왔기에 산길은 편한 길이 된 것이다.

김천에서 영동 상촌면으로 넘어가는 질매재(720m)는 맏형격인 황악산에 손을 내밀어 길은 내니 맨 앞에 있는 삼성산(985m)과 여정봉(1,030m)이 청량한 하늘빛아래에서 손을 흔들어 우릴 반긴다. 대원들도 밝은 표정으로 화답이라도 하듯 수런수런 산길을 깨우며 걷다보니 시오리길이나 되는 산길을 힘들이지 않고 올라선다. 이번에는 이름조차 시원한 바람재(810m)가 자리를 내어 쉬어가라 한다.

사통팔달로 뚫려있으니 바람조차 숨을 곳이 없어 얻어진 이름 바람재, 바람이 모여 살기 좋은 곳이리라. 멀리 영동 상촌면일대와 김천 대항면 주례리까지 눈맛을 맘껏 줄 수 있는 곳이다. '바람맞이' 그렇다고 누가 이곳에서 바람맞았다는 소릴 들어본 적은 없다.

#'취했다 깨고보니 여름이 가고 없더라'

산에서 길과 길이 만나면 오래된 친구처럼 반갑고 마치 우리 몸의 핏줄처럼 산과 들을 이어주고 강을 끌안고 다시 마을을 이어주고 결국은 사람과 사람을 잡아주는 끈이 길인 것이다.

나무가 키를 키운다는 것은 착각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여름산은 그냥 있어도 웅장하고 커 보이지만 겨울산은 왠지 작아 보인다. 더구나 훌훌 털고 제 키를 낮춘 겨울나무를 볼 때마다 1000고지도 안되는 삼성산에 서서도 키 큰 형제봉(1,020m)이나 황악산(1,111m)도 잘 보이고 날씨 탓인지 한가해진 추풍령 고갯길도 시원스레 보인다.

내가 키가 작다고, 그래서 보이지 않는다고 까치발을 딛고 안달하며 세상을 탓했던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겨울산이다. 그냥 서 있어도 잘 보이기 때문에 춥지만 그 추위조차도 상쾌하게 느껴진다.

백두대간에서 세속(世俗)과 끝내 이별하지 못한 속리산에서 이곳까지는 높은 봉우리가 없이 물 흐르듯 내려오다 갑자기 솟아오른 산 인지라, '누런(黃) 학(鶴) 대신 큰 산'악'(嶽)을 얻어 黃嶽山이 되었고, 백두대간에선 유일하게 서출동류형(西出東流形) 산세여서 신라 눌지왕 2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직지사(直指寺)라는 명찰도 들어섰으며, 예로부터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는 물엔 이끼가 끼지 않는다 하여 좋은 물로 대접 받아왔었다. 그 물이 직지사 경내를 흘러 직지천이 됐고 대덕산에 발원지를 둔 감천(甘川)과 함께 물 좋은 김천의 토속주, 과하주(過夏酒)라는 이름난 술도 빚었을 것이다. '취했다 깨고 보니 곁에 있던 여름이 가고 없더라 ' 좋은 술을 얻은 것이다.

#있음(用)이 없음(無)이 아니요

황악산 정상 앞 비슷한 크기의 형제봉은 이름그대로 의좋은 형제처럼 보인다. 자칫 남보다도 못한 형제지간 우애를 자랑이라도 하듯 몇 걸음 앞에 나와 반기는 바람에 우리도 잠시 능선마루에 앉아 숨고르기를 했다. 식념망려(息念忘慮)라. 잠시 생각을 쉬게 하고 걱정을 잊게 하니 멀리 산 아래 독경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온다.

어떤 짐승들은 움직일 땐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데 우리들도 걸을 때 들려오지 않던 소리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나니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본래 지극한 음은 본디 소리가 없다(至音本無聲)' 했거늘 비어있는 것이 무(無)라면 그 빈곳에 있는 것이 유(有)인지라, 있음(有)이 없음(無)이 아니요 깨달음(覺)의 차이니, 스님의 독경은 체(體)가 되어 용(用)이 된 아둔한 내 몸을 목탁처럼 두드리는 것이다. 나무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산 아래 발밑으로 직지사가 한 뼘 안에 들어왔다. 손가락을 자(尺)로 삼아 직지사라 했나, 여우가 자주 출몰했다 해서 여시골산 뒤편 추풍령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엔 지칠 줄 모르게 차량 행렬이 이어 진다.

운수봉(680m)을 지나 뒷동산 같은 작은 봉우리 몇 개를 쉽게 넘어서니 금번 산행 목적지인 괘방령(掛榜嶺)이다. 김천 대항면과 영동 매곡면을 연결하는 고갯마루다. 예로부터 영남대로(嶺南大路)라 불리던 문경새재 길에 비하면 그 이름 때문에 소외까지 당했던 추풍령(秋風嶺)을 곁에 두고 있는 괘방령은 쓸쓸한 길이었다.

추풍령은 관로(冠路)인데 반해 괘방령은 오리(五利)를 위해 십리(十里) 걷기를 마다않던 등짐장수들이 넘나들던 상로(商路)였으니, 멀리 포졸들 그림자만 봐도 주눅이 들어 굽신거리며 넘어야 했다.

그러나 만물계유명(萬物階有名)이라 했다. 방(榜)이 본래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곳에 내걸리는 것인지라, 과거길에 나선 선비들조차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미끌어지는 추풍령보다 방이 붙는다는 괘방령을 넘나들어 그나마 대접을 받았던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까. 괘방령에 서있는 장승표정이 하나같이 민초(民草)들이었고, 법 없이도 살아갈 백성들 모습이니, 피곤에 지쳤지만 그래도 반가움은 숨길 수가 없어 꼭 끌안아 주고 싶었다.




산행수첩

▷찾아 가는길

고속도로에서 김천 IC로 빠져나가 거창으로 가는 3번 국도로 가다가 구성면 지례리 입구에서 충북 영동 상촌면으로 연결되는 지방도 (901번)를 타고 20-30분 정도 가면 우두령(질매재)에 도착 한다

우두령 터널을 빠져나오면 곧바로 오른쪽 능선으로 시그널이 보이고 그 길로 들어서면 된다

하산은 황악산에서 여시골산을 경유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김천 대항면과 영동 매곡면을 연결하는 괘방령에 도착하게 된다

▷산행 시 주의사항

특별히 주의할 사항은 발견되지 않으나 산행 구간 중 식수 구득이 여의치 않으므로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겨울철 산행 시 바람재 구간에선 말 그대로 강풍이 대단하다. 특히 황악산에서 하산 중 운수봉 앞쪽 능선에서 대간길을 놓칠 수 있으므로 독도에 주의해야한다

직지사를 구경하고자 한다면 이 지점에서 곧바로 하산하면 된다


조관형 수필가·동해펄프산악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