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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한국인은 과학적인가

2007-05-30     경상일보
 
몇 해 전 과학기술부와 모 신문사가 주관하는 과학의 날 행사로 몇 개 도시를 순회하며 과학에 관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어느 강연에서 청중들에게 '한국인은 과학적인가'라는 물음으로 말머리를 꺼내니 질문과 동시에 '네'라는 합창이 되돌아왔다.

이렇게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비과학적인 대답'이라고 청중들에게 반 농담을 하고 다른 예를 들었다. 가령 사람들에게 당신은 인종차별주의자냐 물으면 대부분 '나는 인종차별을 반대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 딸이 어학연수 갔다가 몇 달 후 흑인 청년과 팔짱을 끼고 나타나서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흔쾌히 허락할까? 우리나라 부모들 대개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즉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라는 건 단지 무의식적인 모범답안인 것이다. 이같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비논리적, 비과학적 사고에 익숙해져있다.

한국인은 과연 과학적인가- 우리가 과학적인 업적을 이룬 것도 있고, IT산업 같은 분야에선 꽤 앞선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의 의식구조는 아무래도 비과학적이라고 생각된다.

미국에서 안식년을 마치고 귀국할 때쯤의 일이다. 우리 집 김치에 맛들인 미국인 가족들로부터 김치 담그는 법을 적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아내가 김치 담그는 날 나는 필기 준비를 하고 옆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무심코 담글 땐 잘하던 아내가 소금 몇 그램, 고춧가루 몇 cc하고 계량하려니까 갑자기 바보가 된 듯 헤매는 것이었다.

서양음식의 레시피는 정확하다. 계란 두 개에 밀가루 20온스, 버터 10g, 200℃ 오븐에서 30분간- 그러니 그대로만 하면 항상 같은 결과가 나온다. 공학적으로 말하자면 재현성이 좋은 것이다. 우리음식은 그렇게 해선 제 맛이 안 난다. 자연스러워야 한다. 고춧가루 듬뿍, 갖은 양념, 이런 식이다. 손끝에서 맛이 나온다고도 한다.

그림도 서양화는 붓질을 반복해서 보다 완벽하게 표현하려 한다. 반면 동양화에선 붓이 종이에 탁 닿는 순간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더 아름답게 하려고 덧칠을 한다면 서예 작품은 못쓰게 된다. 음악도 서양음악은 박자의 기준이 맥박이다. 맥박은 자유롭지 않고 일정하다. 반면 국악의 박자기준은 호흡이다. 말하자면 정확성보다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것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 보다 조선의 예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했던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 예술작품들의 자연스러움을 극찬한다. 심지어 조선의 집들은 일본집처럼 반듯반듯 인공적이기 보다 마치 새들이 둥지를 튼 것처럼 자연스럽고 아름답다고 평한다. 우리는 예로부터 음식이나 예술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서 과학을 초월하고 과학보다 상위의 가치를 추구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실생활에서는 불편하거나 불리한 점도 많은 게 사실이다. 조선시대에는 도량형 (度量衡)이 정비되지 못하여 공업 발달에 지장을 주고 상거래도 불편하였다. 의식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매사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옳고 그른 것을 가린다는 뜻인 시비(是非)가 나쁜 뜻으로 쓰일까. 물론 꼬치꼬치 따지는 것보다 인간관계에서 여유는 있을지 모르나 합리적 사고가 부족하여 법이나 행정 같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분야에선 발전이 없게 된다. 과학적 사고방식은 과학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선거를 예로 들어보자. 유권자들이 과학적으로 냉정히 판단하지 않고, 분위기에 휩쓸리거나 감정에 들떠 경솔한 결정을 내린다면 부적격자들이 득세하여 나라를 어지럽힐 수도 있다. 비과학적 선택의 결과는 운전도 서투르고 길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운전대를 맡긴 꼴이 되어 자동차가 제 길을 따라 운행할리 없다. 지난 수년 간 이 나라는 올바른 길을 달려왔는가. 거꾸로 가진 않았는가. 우리사회는 평화롭고 활기찼던가.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이제는 과학적 사고와 냉철한 이성이 이 사회를 이끌게 되기를 바란다.


이규철 울산대 교수·전기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