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카지노

[옛 사진으로 보는 울산이야기]해산물 진상 위해 제주도 해녀 불러와

26. 해녀와 무질 - 1900년대 들어 지역 처녀들도 무질 배워 구분 없어져

2010-01-03     박철종 기자
▲ 해녀 작업, 1936 히나세 제공
울산은 바다를 끼고 있어서 예전에는 해산물을 매년 세공(歲貢)하였다. 진상물로는 미역·김(海衣·해의)·광어·대구·상어(沙魚·사어)·황어·은어·청어·홍합·전복 등으로, 전복과 청어는 생어(生魚)로 진상하기도 했다. 이러한 생선류는 연안에서 그물이나 대나무로 엮은 통발(대발) 또는 낚시로 고기를 잡았지만, 심해에 있는 미역·말·어패류 등은 자맥질을 할 수 있는 해녀를 데려다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주도의 어민 수 명을 데려다가 생복 잡는 일에 종사케 하면서 내황(內惶)에 살게 하였는데 그 자손들은 머리카락이 붉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기이한 일로 보였다. 그 두발이 보기 싫다하여 그들을 두모오(頭毛惡)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현곡 이유수 선생의 <울산지명사> 설화편에 전해온다.

해녀를 잠녀(潛女)라고도 하는데, 자맥질을 잘하는 여인이라는 뜻이다. 1913년 5월7일 매일신보 기사에 ‘울산해조분쟁 해결’이라는 제목 아래 이런 내용이 있다. “…석화채(石花菜)·은행초(銀杏草)는 지금으로부터 17~18년 전부터 제주도민의 해녀가 연년이 이 지방에 와서 잠수 채취에 종사하여 왔고…생산물의 과반은 제주 해녀가 채취한 것이오. 또 제주 해녀의 채취가 필요할 시는 매년 부산과 목도에 도항하는 해녀와 상당액의 선급금과 채취물의 매매 약속을 한 후에 연안의 적정한 곳에 가서 잠수 공급을 하고 있으나, 향후에는 어업령에 의한 공동시설의 설치와 어업조합의 설립을 요구하여 관철하였다.”

이때부터 제주 해녀들은 울산 연안 곳곳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뭍의 처녀들도 무질을 배워서 그 구분이 없어졌다. 해녀들이 작업하는 모습은 울산의 해안가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데, 주로 해산물을 채취, 미역돌을 맬 때나 미역을 채취할 때, 집단으로 자맥질하는 모습은 장관이다. 지금도 방어진 서무끝(섬끝) 마을에 가면 해녀들이 성게·멍게·해삼·어패류 등을 채취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 사진의 배경이 바로 이곳 동쪽 소바위 해안인 것으로 보인다.

장세동 동구지역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