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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있는 교과서 속 문화탐방]산자락 골짜기에 안긴 건물배치 ‘비정형적 조형미’ 탁월

2. 조선왕조 500년의 흔적 창덕궁

2010-03-02     홍영진 기자
형제의 난 겪은 태종 이방원, 피바람의 현장 경복궁 떠나려 건축
임란 때 왜군에 소실됐다가 광해군에 의해 재건 정궁 역할 담당
인정전·돈화문 등 보물 수두룩…정자·연못 어우러진 비원 절경
▲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전경.
새 학기를 맞아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며 무엇보다도 왕들의 삶의 모습과 흔적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창덕궁을 다녀왔다.

울산지역 학부모와 학생들이 창덕궁을 여행할 때 좀 더 알찬 탐방이 될 수 있도록 창덕궁의 역사와 주요 시설들에 대해 간략하게 알리고자 한다. 현장에서 체험한 에피소드 및 탐방 준비시 주의사항 등도 덧붙인다.



■창덕궁의 역사와 특징

창덕궁은 1405년(태종5년)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고 불리었다. ‘동궐도’에는 창덕궁, 창경궁의 예전 모습들이 그대로 그려져 있어 당대 궁궐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1·2차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거머쥔 태종 이방원은 피바람의 현장이었던 경복궁에서 기억 속 상처를 치유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왕권의 정통성이 미미한 가운데 정궁의 역할을 보완하고 역병과 재난 발생시 임금이 이어할 수 있는 이궁이라는 명분 아래 창덕궁은 지어진다. 창덕궁의 최초 건설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 창덕궁은 건물들을 산자락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여 비정형적 조형미를 드러낸다.
태종 본인이 덮어두고 싶은 과거사를 청산하고자 의도적으로 ‘궁궐 짓기’에 나선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창덕궁은 임진왜란으로 왜군의 손에 속수무책으로 불타 버린다. 한때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조선의 난민들이 난동을 일으켜 궁궐 내의 각종 보물들을 약탈하고 불질렀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모두 거짓이다. 일반 평민은 물론 양반이라도 궁궐은 자유롭게 드나드는 공간이 아니었다. 궁궐은 두려움과 경외의 장소일 뿐이었다.

전쟁의 화마를 이겨내고 집권한 광해군은 정궁이었던 경복궁이 불길하다면서 창덕궁을 다시 짓는다. 이때부터 창덕궁은 조선의 새로운 정궁으로서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정궁 역할을 담당했다. 이로써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하였던 궁궐이라는 영예도 더불어 누리게 되었다.

창덕궁의 주요 특징은 경복궁과 확연히 다른 건물 배치에서 찾을 수 있다. 경복궁은 주요 건물이 좌우 대칭 일직선상에 놓여있다면 창덕궁은 돈화문에서 인정전·선정전·낙선재 등이 산자락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여 비정형적 조형미를 드러낸다. 창덕궁의 다이내믹한 건물 배치로 인해 경복궁을 관람할 때 보다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며 꾸준히 해설사를 따라다닌다.

또한 비원으로 알려진 창덕궁 후원은 다양한 정자·연못·수목·괴석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비원이라는 용어는 본래 창덕궁 후원을 관리하는 관청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으나, 이후 일제에 의해 창덕궁 전체를 아울러 부르게 하는 등 왕실 권위를 훼손시키는 행동들을 무수히 행하게 된다.

창덕궁은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궁궐이다.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지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구석구석 아름다운 건축물

돈화문(敦化門·보물 제383호)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당대에는 이층 문루에 종과 북이 있어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돈화문 앞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언제나 눈에 거슬린다. 이 도로로 인해 종묘와 창경궁이 이등분으로 나뉘어졌다. 궁궐 훼손을 위한 일제의 계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이 앞을 지날 때마다 씁쓸한 마음이 든다.

▲ 꽃망울을 틔우려는 창덕궁의 목련.
인정문(仁政門·보물 813호)을 지나 창덕궁의 정전(政殿)인 인정전(仁政殿·국보 225호)으로 들어선다. 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됐던 곳이다. 연산군~고종에 이르기까지 8명의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했다. 이밖에도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행사 때에는 인정전 앞 품계석에 맞춰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도열했다. 이 공간 또한 일제의 궁궐 훼손 정책에 의해 한때 잔디로 깔려져 그 모습이 초라했으나, 1994년 복원공사를 통해 새로이 품계석과 박석을 깔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선정전(宣政殿·보물 제814호)은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便殿)이다. 선정전의 내부까지 관람하려면 일반 입장권으로는 불가능하다. 1만5000원의 자유관람료를 내야 한다.

거대한 것을 생산한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곳, 대조전(大造殿·보물 제816호)은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구성돼 있다. 이 건물은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임금의 침소에 또다른 용을 두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이곳에서 승하했다.

궁궐의 후원,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芙蓉亭)은 임금이 오락과 휴식을 즐기던 공간이다.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 속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만들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에 다녀온 정조는 너무 기쁘고 즐거운 나머지 부용정에서 규장각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개인·가족 답사를 준비하려면

창덕궁을 찾을 때는 일정한 관람시간에 맞춰 입장해야 한다. 한국인들의 관람은 9시15분을 시작으로 30분마다(매 시간의 15분·45분) 입장하도록 되어 있다.

▲ 이석민 현대예술관 문화기획과 교과서탐방 지도자

시간 맞춰 궐 내로 들어서면 전문 해설사가 창덕궁 구석구석을 이끌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린이들과 함께 창덕궁을 여러 번 답사하면서 몇몇 해설사들 중에는 어린이들의 연령을 고려하지 않고 눈높이에 맞지 않는 설명을 들려주는 이도 있다는 점을 느꼈다. 어려운 용어가 있으면 풀어서 해설해 주는 배려가 있어야 아이들이 지루해하지 않는데, 그러한 노력이 조금 부족한 듯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부모 또는 인솔자가 최소한의 사전지식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낮 시간에는 보통 100여명에 달하는 관람객들이 몰리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는 벅차고 힘들 수 있다. 오전 시간대를 활용하여 현장학습을 실시하는 것이 낫다.

이석민 현대예술관 문화기획과 교과서탐방 지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