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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을 주목한다]“노동자에 대한 사회의 싸늘한 시선 비판”

[울산 문화예술인 칭찬릴레이] - <4> 정인화 시인

2010-03-04     박철종 기자
▲ 정인화 시인
인화형. 이렇게 공개된 편지를 허락 없이 쓰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첫 번째의 전태일 문학상을 받은 시인. 그리고 여러 권의 시집을 낸 노동시인. 형에게 붙여진 제목들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런 제목보다 먼저 이웃동네의 술 좋아하는 작은 아저씨로 먼저 다가왔습니다. 형의 아이 민교가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 처음 만났으니 벌써 십오 년은 된 것 같습니다.

지난 겨울은 유달리 몸과 마음이 예년보다 더 추웠습니다. 계시는 곳, 은현리 덕산마을의 올라가는 왼쪽 즈음의 청죽들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그 추위에도 푸르름을 지켜낸 힘이 그리워서이기도 합니다. 아니 정말로 그리운 것은 청죽에서 ‘비수’를 읽어내고 ‘미동 조차 없는 대추나무’에서 ‘활시위’를 읽어내는 형의 눈일 겁니다.

여러 해 전 오랫동안의 틈을 꺾고 <열망>이라는 시집을 내셨지요. 아마 다섯 번째 시집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다시 그 책을 꺼내어 해가 비치는 창가에 앉아 찬찬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종횡무진’. 형의 시집을 보면서 이 단어가 퍼뜩 떠올랐습니다. 팔십년 오월 전라도 광주 금남로와 무등산의 과거를 지금으로 불러내는 역사적 상상력과 하늘 높은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하다가 숨진 김주익, 그리고 한진중공업에서 숨진 박창수, 부산 전교조 해직교사였던 신용길, 노동자 권미경을 초혼하여 지금 우리 앞에 불러내고 있었습니다. 과거를 불러내어 현재에서 숨 쉬도록 하는 주술사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을 수직으로 오르내리면서 역사의 눈으로 우리를 다시 볼 수 있도록 했다면 짐승들을 빗대어 우리의 수평을 확인해 주는 대목 또한 형의 눈이 가지는 큰 힘이지요. 형의 시입니다.

‘…부리를 잘린 채/ 죽을 수도 없는 쇠창살에 갇혀/ 밤이 없어 잘 수 조차 없는/ 그 지옥의 공간에서 쏟아져 나온/ 닭알을 봅니다// 아무래도/ 이 닭알에는 분노가 섞여있을 것이라는/ 얼마쯤은 광기도 서려 있을 것이라는/ 그래서 이 닭알을 먹는/ 우리 인간도 나날이 분노하고/ 조금, 조금씩 미쳐가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닭알을 보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가해자로서의 인간을 이렇게 섬뜩하도록 아프게 보았다면 상상의 전환을 한 또다른 시 하나는 경악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인간이란 동물을/ 애완용으로, 식용으로 사육합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들의 축제일엔/ 사람을 훈제해서 먹기도 하고…’(만약…, 만약에)

이렇게 자연에 천연덕스럽게 가해지고 있는 가학적 인간의 모습과 그것을 거꾸로 비틀어보는 상상력을 통해 형은 이 문명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야만을 이야기하고 있더군요.

그뿐 만이 아닙니다. 형의 시선은 좀더 넓은 폭으로 세계 안에서의 폭력구조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 9월 쌍둥이 빌딩의 폭파로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면서, 한편으로는 지구상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추악한 전쟁과 폭력을 꼬집어 내셨지요.

‘…/ 칠레에서, 과테말라에서, 베트남에서, 이라크에서/ 일본에서, 중동에서, 유고에서, 이 한반도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세계 곳곳에서, 지구 전역에서/ 미국 정권과 결탁한 전쟁상인들에게 희생된/ 또 다른 수많은 9월을/ 기억에서 살려내어/…’(추모한다)

이 시 속에서 형은 우리가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지구적 폭력 속에 숨어있는 힘의 관계와 야만성을 날카로운 균형감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형을 가장 미덥게 여기고 가장 깊이 안을 수 있는 지점은 이런 날카로운 분석의 지점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깊게 젖은 목소리로 “희섭아…사는 게 와 이렇노” 하시면서 스스로의 내면에 있는 아픔들을 토해낼 때였습니다. 치열하게 노동의 중심에서 글과 행동을 해내었던 투사의 모습은 어느새 세월과 함께 틀니를 해 넣을 만큼 몸과 마음 모두 다 사그라졌지요. 하지만 그것은 결코 사그러진 것이 아니라 형의 내면에 있는 다른 생명에 대한 외경과 인간의 위치에 대한 성찰의 몫으로 바뀌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다녔던 자동차부품 조립공장에서의 일도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베트남에서 온 젊은 산업연수생들의 근로조건을 말씀하던 중에 일 마치고 집에 와서는 그 힘든 와중에도 인터넷으로 베트남어를 배워 그들과 소통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시인의 정열은 이런 곳에서 나타날 수 있구나 하는 경외를 느꼈습니다. 찾아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가는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은 진실로 강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일 겁니다.

▲ 이희섭 사진작가

‘니오타니’라는 용어가 생각납니다. 생물학적 성장이 끝이 났음에도 의식 안에선 호기심, 상상력, 장난치기, 새로운 것에 대한 배움의 욕구들 같은 조기 성장단계를 여전히 밟아 나가며, 어린 시절의 감성과 환상들을 그대로 간직한 어른을 은유적으로 지칭하는 생물학적 용어라고 하지요. 인화 형 안에는 이런 순절한 힘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증거가 거짓말을 못하며 작은 것에 기뻐하고 눈물이 많은 것들입니다. 이런 투명한 힘이 형의 앞으로의 시 작업에 더욱 빛을 주리라고 확신합니다. 늘 건강하시어 긴 호흡의 아름다움을 주셔야 합니다.

이희섭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