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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인문강좌]민주적 헌정질서 추구 통해 법치국가 성숙

<제9강> 공동체를 위한 법의 정신, 법치(法痴)를 넘어 법치(法治)로

2010-04-26     박철종 기자
법의 형식성만 강조하는 저급한 법치는 공동체 해치는 재앙
부당한 법에 대한 굴종이 아닌 저항할 도덕적 의무 있어
비폭력으로 상징되는 불복종 정신이 미국 민주주의 구원
▲ 미국의 흑인민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부당한 법에 저항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음치(音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음에 대한 감각이 둔하고 목소리의 가락이나 높낮이 등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또 ‘법치(法治)’는 단어는 한국사회 전반에서 행위의 ‘정당성’ 근거를 제시하기 위한 어휘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자주 사용되는 ‘법치’가 법치(法治)가 아니라 법치(法痴)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합법성’과 ‘정당성’도 동의어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법치(法痴)는 ‘법에 대한 감각이 둔하고 법 적용의 높낮이 등을 분별하지 못해 법을 억압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묵인하는 태도’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한국사회에서 ‘법치’는 ‘법이 허용하는 행위는 무엇이든 정당화 된다.’ 또는 ‘법에 근거한 행위는 무엇이든 용인 된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만약 ‘법치’가 이런 뜻이라면, 인류사에서 법치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한 정치집단은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가 아닐까 한다. 나치는 쿠데타로 집권하지 않았다. 국민의 지지로 선거에서 의회의 다수당이 되었고, 합법적으로 집권했다. 과거 한국의 군사정권들이 형식적 합법성을 갖추지 못한 것과 대조된다. 나치가 행했던 전쟁범죄의 대부분은 의회를 통과한 법에 근거한 것들이었다. 히틀러는 법치의 수호자인가? 그렇다면, 진정한 법치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민주적 헌정질서’를 의미한다. 민주적 헌정질서는 단지 기존의 법질서의 지속과 유지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적 헌정질서는 헌법의 정신이며 헌법마저도 지향해야 하는 법이념이다.

소크라테스는 일찍이 철학을 포기할 것을 조건으로 석방하는 판결을 내린다고 할지라도 이를 거부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고 잘못 알고 있다. 이는 심히 악의적으로 그의 말을 왜곡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법을 수단으로 삼아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아테네의 저급한 무법의식을 경계한 것이고, 감옥으로 찾아온 ‘크리톤’이라는 젊은이에게 법철학 강의를 들려준 것이다. 그가 독배를 마신 것은 ‘처벌감수 의사’, 즉 도덕적 정당성을 위해 처벌을 감수하는 ‘시민 불복종’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함이었다. 독재자들은 역설적으로 이 상황을 ‘악법도 법이다’라는 구호로 변장시켜 유행시켰고,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지식인들이 이에 동조했다. 소크라테스가 경계한 것이 바로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법치(法痴)’이다.

흑인을 차별하던 미국에서 ‘형식적 합법성’ 만을 강조했다면, 흑인이 대통령이 되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았을 것이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흑인민권운동 과정에서 백인들로부터 “왜 법을 지키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들었다. 그는 “법에는 정의로운 법과 부정의한 법이 있다. 우리는 부당한 법에 저항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라고 대답했다. 또한 그는 “굴종의 길은 도덕적인, 영적인 자살의 길이다. 반면 폭력은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쓰라림을, 파괴자들에게는 잔혹성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비폭력 저항의 길은 구원과 사랑의 공동체의 창조로 이끈다.”라고 했다. 비폭력으로 상징되는 그의 불복종 정신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구한 것이다. 백인에게 굴욕적으로 버스의 의자를 양보해야만 했던 시절, 이를 거부했던 평범한 주부 로사 파크스의 위대한 점은 부정의한 법에 저항함으로써 받게 될 처벌에 굴하지 않았고, 이것이 흑인민권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국가는 법의 형식을 통해 범죄를 자행할 수 있다. 나치가 그러했고, 과거 우리의 군사독재가 그러했다. 만약 우리가 존재하는 법질서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면 우리 중의 대다수는 아직도 노비로 생활해야 하고, 여성들은 교육과 사회참여 등의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안식일에 환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을 비난했던 율법주의자들을 기억해 보자. 법의 형식성 만을 강조하는 저급한 법치는 재앙일 뿐이다.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섭게 공동체를 해친다.

사람들은 “왜 때를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문제를 악화시키느냐?” 라고 자주 묻는다. 이 질문은 킹 목사가 자주 듣던 질문 중의 하나다. 킹 목사는 반문했다. “내가 이끈 저항운동 중에서 흑백 분리로 인해 부당한 고통을 당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때가 됐다’라고 인정한 상황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그리고 그는 대답했다. “우리는 기다리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 왔다. 기다리라는 말은 ‘절대 안 된다’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검찰, 경찰 수뇌부 등 권력기관들은 법치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언론들도 법치의 중요성을 매일 강조한다. 시민들도 일상에서 법치라는 단어가 주는 무언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그러나 아무도 진지하게 법치의 의미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국사회에서 법치(法痴)의 비극이 현실이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공동체를 위한 성숙한 법치(法治)는 어리석은 법치(法痴)가 아니며 민주적 헌정질서를 추구해야 하는 시민의 도덕적 의무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이정훈 울산대학교 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