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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口述)로 정리하는 울산이야기]과수원과 바꾼 임야, 문화재로 묶여 10여년 속앓이

5.방기리 알바위의 저주...

2010-06-30     홍영진 기자
문화재는 역사, 문학, 예술, 과학, 종교, 민속, 생활양식 등의 영역에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인류 문화활동의 소산을 이르는 말이다. 문화재는 유형·무형 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로 분류된다. 종류와 가치에 따라 또다시 국보·보물·사적·명승·천연기념물·중요무형문화재·중요민속자료·보호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된다. 이처럼 가치로운 문화재는 조사와 발굴 뿐만 아니라 복원과 복구, 올바른 관리와 보호, 그리고 전시 등을 통한 홍보와 국민교육 등이 필요하다.

하지만 문화재 지정이 모든 이들에게 축복이 될 수만은 없다. 지역 주민들에겐 보존해야 할 가치로운 문화재가 하나 더 생긴다는 기쁨으로 다가오지만, 그 이면에는 그로 인해 말 못할 속병을 앓는 이들도 있다.

이번 연재에서는 바로 그러한 그늘 속에서 10여년 이상 속앓이를 해온 어느 노부부의 사연을 소개한다.

농협조합장 친구 위해 교환 결정
울산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된 울주군 삼남면 방기리의 ‘방기리 알바위’ 또한 공정한 절차를 밟아 지난 1990년대 초반 문화재로 인정받았다.
▲ 울산남구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채은 소장이 알바위 부지의 소유주인 박원석씨로부터 알바위 부지 계약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은 이야기가 있다. 기름진 과수원과 맞바꾼 임야가 하루 아침에 문화재로 묶이는, 기막힌 사연이 있다. 주인공은 방기리 알바위 문화재 부지(500여평)의 실소유주인 박원석(75·울주군 방기리)옹이다.

박옹은 젊은 시절 이장을 지내며 마을발전을 위해 오랜 기간 애썼다. 지난 1994년에는 낙후된 마을에 농업협동조합이 들어오면 보다 나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이곳저곳 마땅한 부지를 물색하기도 했지만, 딱히 여기다 할만한 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금의 알바위가 있는 곳, 당시에는 마을 한복판 작은 동산으로 ‘동뫼’로 불리던 곳이 매물로 나왔다. 같은 마을 젊은이가 조상의 산소가 있던 자리를 내놓자 조합 측이 건물부지 용도로 쓰기 위해 구입했고, 신축사업이 본격적으로 물꼬를 트는 듯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은 수백년 간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어르신들의 쉼터였던 동뫼에 대한 애착이 컸다. 당연히 반대를 하는 동네사람이 나타났고, 급기야 농협 신축사업은 흐지부지 될 조짐마저 보였다. 이 모든 책임을 친한 친구였던 조합장이 뒤집어쓰게 되자 박옹은 부랴부랴 자신의 금쪽같은 과수원 부지와 동뫼를 교환하기로 결정했다.
▲ 알바위 부지와 과수원을 교환한다는 계약서.


“교환계약서를 쓴 지 일 주일이나 지났나 몰라. 그 때는 울산광역시가 아니라 경남도에 속한 울산시였는데, 도에서 동뫼 속 알바위를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공문서가 날아온 거야. 중매를 하다가 자기 딸을 준다는 옛말이 있는데, 적당한 부지가 없어 쩔쩔 매는 친구가 안돼 보여서 땅을 교환했더니 그런 날벼락이 떨어지더란 말이지.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말이야.”

관청 부주의로 재산권 행사 불가능
박옹은 관청의 무관심으로 이같은 일이 빚어진 것이라며 아직도 땅을 친다. 박옹이 토지거래 협의서 신청과 임야 매수 후 이용계획서를 제출한 날은 5월20일. 하지만 해당 임야는 이미 5월16일 문화재로 지정되어 도 문화재위원회에 회부된 상태였다. 이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울산군은 해당임야에 대한 이용계획서를 검토하면서 문화재임을 감안하여 박옹의 신청을 기각했어야 옳았다는 주장이다. 관청의 작은 부주의가 평생을 옭아매는 동아줄이 되라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방기리 알바위는 도 기념물 137호에서 광역시 승격과 맞물려 시로 이관, 현재는 울산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보호되는 중이다.

집 마당에서 바로 내다뵈는 알바위를 바라보는 일이 하루하루 고역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도, 군, 시 등을 오가며 민원실에 탄원서를 내기를 수십 번. 하지만 한 번 지정된 문화재 명패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만 되풀이됐다.

▲ 박원석씨 집앞에 자리한 동뫼 속 방기리 알바위.


“한 20년 가까이 되니 이제는 욕심도 없어지대. 처음에는 문화재 관람하러 오는 사람들까지도 미워 보이는 거야. 남 속타는 줄도 모르고, 버스 타고 와서 알바위를 이리저리 살피는데, 어떻게 예쁘게 보이겠어. 내 땅에 함부로 들어가지마라, 큰소리도 수백 번은 더 쳤을걸.”

남의 땅서 농사 짓는 아내에 미안
박옹은 한 평생 남의 논밭에서 농사를 짓는 아내를 볼 때가 제일 미안하고 멋쩍다. 해마다 굵은 과실을 수확하던 과수원을 내주고 내 것이나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빈 껍데기 땅을 떠안게 되었으니 말이다.

요즘 알바위 바로 앞에는 새로운 신축건물이 들어서는 중이다. 신축이 제한되는 구역에서 조금 빗겨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슷한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박옹의 빈터는 알바위와 한 필지에 속한다는 이유는 작은 창고조차 제대로 올리지 못한다. 바로 옆 하천변 공터에 콩을 심어도 꼬박꼬박 임대료를 내고 작물을 지어야 한다. 이래저래 억울함은 커가지만, 문화재 지정의 굴레를 벗어나기엔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겪일 뿐이다. 그렇게 인정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흐른 셈이다.

“알바위를 연구한다고 종종 글 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찾아와요. 알바위 중간중간 제단이 있었고, 탑이 있었다는데, 그것도 제대로 알고 하는 소린지 모르겠어. 그만큼 소중한 우리 재산이라면, 누군가 이렇다 할 연구라도 해야할 것 아니냐고. 문화재라고 묶었으면, 관리라도 해 주어야지. 저렇게 방치해 두면서, 왜 우리 두 노인네 손발은 묶어두냔 말이지.”

알바위는 바위그림의 일종으로 바위표면에 알 모양의 구멍이 새겨져 있는 것을 말한다. 작은 돌로 문질러서 둥글고 오목하게 패인 것으로 알구명, 성혈 등으로도 불린다.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신앙적 의식의 표현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고대인들이 별자리를 새긴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민간신앙의 한 줄기를 담당하며 기원과 희망을 상징해 온 알바위. 오로지 탄식의 대상이 돼버린 알바위가 언제쯤 소망을 실현시켜 주는 제 기능을 발휘할 지 박옹 조차 궁금할 따름이다.

글·사진=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aykt6.com

자문=박채은 남구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