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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언더그라운드를 찾아서]“첫사랑 색소폰이 울었죠 떠나지 말라고”

10.색소폰 연주자 김봉수
첫 눈에 반한 연인 색소폰
수차례 반복된 이별과 재회
하늘이 맺어준 인연에
감동의 연주로 보답 다짐

2010-07-14     전상헌 기자
▲ 자신의 애인과 같은 색소폰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봉수 색소폰연주자. 임규동기자
“음악요? 인생입니다. 그것도 달콤하면서도 쓰디쓴 인생 그 자체죠. 그래도 색소폰만 연주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죠.”

‘중년 남성의 로망’ 색소폰을 연주하는 김봉수(41·중구 태화동)씨와 색소폰은 정말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씨가 색소폰과 처음 사랑에 빠진 것은 1985년 고등학교 입학식 날 색소폰을 멋지게 부는 한 선배의 모습을 본 후부터다. 그 길로 바로 브라스밴드에 가입해 색소폰을 배우려 했지만 신입생이었던 그는 선배들이 정해주는대로 비어있던 파트의 악기를 배우는 수 밖에 없었다. 트럼펫을 배정받았던 그는 정말 색소폰을 배우고 싶어 선배들을 졸라댔다.

이런 김씨가 못마땅했던 선배들은 한동안 그를 괴롭히다 결국 테너 색소폰을 배정했지만, 김씨는 자신이 하고 싶은 알토 색소폰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선배들을 졸랐다.

김씨는 “선배들이 소리를 내지 못하면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알토 색소폰을 내놓았는데, 한 번도 만져보지도 못한 알토 색소폰에서 소리가 났다”며 “그 길로 바로 음계를 배우고 ‘삑~삑~’ 거리며 ‘고향의 봄’까지 완주하자 선배들도 인정해 주는 눈치였다”고 말했다.

이런 김씨의 색소폰 사랑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잠시 막을 내렸다. 집안의 반대로 음악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7남매 중 막내인 그는 부모님 뜻에 따라 음악을 하지 않기로 하고 고향을 떠나 가장 친한 둘째누나가 있던 울산으로 와 취직을 하며 음악생활을 접었다.

하지만 ‘하늘이 내려준 사랑’ 색소폰은 그리 쉽게 그를 떠나지 않았다. 군 입대할 나이가 되자 다시금 의미있는 군 생활을 하기 위해 군악대에 지원한 것이다. 2년 넘게 색소폰을 놓았지만 녹슬지 않은 연주를 선보이며 당당히 공군 군악대로 입대했다. 게다가 일년 후에는 국방부 군악대로 차출돼 군생활 내내 쟁쟁한 실력자들과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김씨는 “지휘자가 합주시간에 실력이 없으면 바로 쫓아내는 경우가 허다해 이를 깨물고 연습을 한 것이 지금도 많은 도움이 된다”며 “정말 밥만 먹으면 연습을 하는 것이 일과가 될 만큼 노력을 한 결과 노태우­고르바초프 정상회담 때도 선발돼 공연을 하게 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군생활을 마치고 다시 울산으로 돌아와 색소폰을 몸에 붙이고 다녔다. 누나와 함께 고향집에는 비밀로 하고 눈만 뜨면 쉴 새 없이 연습을 했다. 남들처럼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직장도 아니고, 대우도 좋지 않았지만 음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좋아 묵묵히 음악을 했지만 결국 고향집에서 알게 돼 다시 음악을 접게 됐다.

그는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려고 대구지하철 공사장으로 떠나 몸을 혹사 시켰다. 하지만 매일 밤 강가로 나가 색소폰을 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울음을 터트린 적도 많았다.

김씨는 “결정적으로 다시 색소폰을 불게 된 것은 지하철 공사장에서 벌어진 에이치 빔 붕괴사고 때문이다”며 “무너지는 순간 다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천운으로 빈 공간 사이에 들어가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히 살아 내 길은 음악이라고 다짐하게 됐다”고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수 차례 색소폰을 버리려 했지만 다시 색소폰과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김씨는 앞으로 남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을 하고 싶다고 한다. 다만 듣는 사람도 애절하고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게 연습을 하며 후회없이 따뜻한 가슴이 느껴지는 음악을 하는 것이다.

전상헌기자 honey@ksilbo.aykt6.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