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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라틴 아메리카]정치혼란 속에서 민중과 함께하는 종교의 역할

10. 로메로

2010-09-09     박철종 기자
‘오스카르 로메로’라는 실존인물을 다룬 존 두이건 감독의 ‘로메로’(1989)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중앙아메리카 엘살바도르의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심각한 갈등상황을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로메로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중의 대변자로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나 아르헨티나의 체 게바라처럼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로메로’는 가톨릭교회와 해방신학, 정치권력과 가톨릭교회의 관계, 권력과 결탁한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정책, 그로 인한 끝없는 빈부격차의 현실을 드러낸다.



영화 첫 장면은 자유선거를 요구하는 집회다. 이는 엘살바도르의 현대정치사가 갈등과 유혈사태의 연속이었으며, 시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투표장 부근의 시민들의 대화는 정부가 소작농과 빈농을 갈수록 학대하고 있으며, 엘살바도르 사회가 심한 갈등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준다.

로메로가 대주교로 임명되었던 1977년에 엘살바도르는 내전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보수적이며 권력층과의 관계도 원만한 사람이다. 직접적인 현실참여를 통해 사회를 바라보기보다는 책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인물이다. 로메로는 대주교 착좌식에서 엘살바도르의 교회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새롭게 확산되던 해방신학을 경계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해방신학을 옹호하는 성직자들을 사회적 갈등과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는 세력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가 친정부세력에게 암살되면서, 로메로 신부의 생각은 서서히 바뀐다. 정부가 이 사건을 미온적으로 처리하자, 고위 성직자들은 대통령 취임식 참석을 거부하고, 이는 정부와 가톨릭교회의 대립으로 발전한다.

이후 로메로는 극심한 빈부격차, 가난, 탄압적인 군사정권, 인권유린 등 엘살바도르 사회가 겪고 있는 참혹한 현실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로메로는 민중들을 위해 과연 가톨릭교회와 성직자가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엘살바도르 민주주의와 인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이후 군사정부는 반정부 시위자들에게 무차별적인 무력대응을 감행한다. 이는 결국 게릴라들이 더욱 강한 저항을 하는 계기가 되고 상황은 내전으로 치닫는다. 이제 그는 대다수의 가난한 엘살바도르 국민들의 편에 서서 이들을 대변하고, 군사정부의 탄압과 인권유린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그러자 군사정부는 1980년에 로메로 대주교를 살해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톨릭교회는 정복의 선봉으로 들어와 식민시대에는 정치·경제·사회 전반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라틴아메리카 독립 이후 형식적으로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만, 가톨릭의 영향력은 지금도 여전히 크다. 특히 정부의 주요 행사에 고위성직자들이 참석하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정부에 대한 지지와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간접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이러한 정치권력과의 결탁은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심화시켰다.

‘해방신학’의 등장은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상황에 대한 자성과 정치억압과 극심한 빈부격차로 고통받아 온 민중들의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방신학’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입장에서 교리를 해석한다. 또, 불평등과 부조리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한 사회참여를 중시했다. 영화 속의 이러한 사례 중 하나로, 가톨릭신부들이 빈민마을의 기초공동체를 이끌거나 돕고 있는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가톨릭에 기반을 둔 이러한 풀뿌리 조직은 특히 소외된 농촌지역에서 활성화 되었다. 이러한 도시 빈민지역과 농촌의 기초공동체는 지역 리더들에 대한 교육과 정치활동의 토대를 제공했고, 라틴아메리카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냉전 당시 미국이 라틴아메리카 정치를 어떻게 좌우하고 있었는지도 ‘로메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냉전 상황에서 미국의 관심은 인권이나 사회변화가 아니라 자신들의 뒷마당이라고 여기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제2의 쿠바가 탄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로메로 대주교의 한마디는 이러한 상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저는 오늘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더 이상 무기를 보내지 말라고, 이는 우리 국민들을 죽이는데 사용될 뿐이라고.”

‘로메로’에서 엘살바도르 사회는 극단적인 빈부격차, 혹독한 군부정권의 탄압, 심각한 정치 불안 등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한 모습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엘살바도르와 중미국가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다. 이후 엘살바도르는 민주화되고 경제성장을 위해 노력해 왔으며 과거와는 비교적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오랜 내전을 경험한 엘살바도르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의 니카라과나 과테말라 등은 그 후유증이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여전히 남아 있기도 하다.

이순주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