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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라틴 아메리카]영화는 시가 되고 시는 영화가 되는 사랑과 우정 이야기

17. 일 포스티노

2010-10-28     박철종 기자
가을은 잔잔한 수채화같은 영화를 보기 좋은 계절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실 감동적인 시 한 편이 그리워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칠레의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에 바탕을 두고 제작된 마이클 레드포드 감독의 ‘일 포스티노’(1994년)는 시처럼 아름답고 수채화처럼 은은하면서도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래서인지 올해 창단 25주년을 맞는 LA오페라는 창작 오페라 ‘일 포스티노’로 공연을 시작한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미국의 소설가 존 업다이크는 “예술이 인생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작품”이라고 이 영화를 평했으며, 커트 보네거트는 “영화는 시가 되고 시는 영화가 된다”라는 말로 자신의 감동을 표현했다. 우리나라의 시인 황지우도 이 영화를 보고 ‘일 포스티노’라는 제목의 시를 쓰기도 했다. 또한 이 영화의 끝에 나오는 네루다의 ‘시가 내게로 왔다’라는 작품도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다. 그리고 우리나라 영화 ‘연애소설’에서는 세 등장인물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는 장면도 나온다.

이렇게 전 세계인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은 이 영화는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이런 우정은 실제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원작자인 스카르메타가 상상한 것이다. 이 영화에는 칠레의 탄압적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간헐적으로 언급되지만, 중심 내용은 역사적이지도 않고 정치적이지도 않게 사랑과 우정을 이야기한다.

‘일 포스티노’의 무대는 이탈리아의 작은 섬이고 시대적 배경은 1952년 무렵이다. 네루다와 그의 아내 마틸데 우루티아는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칠레에서 추방되어 그 섬을 정치적 망명지로 삼는다. 우편배달부 마리오 루폴로는 영화관에서 뉴스를 통해 네루다가 섬에 온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고, 기차역에서 그를 기다리는 수많은 여자들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시가 여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도구라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네루다의 시집을 구입해서 시를 읽으며 시를 쓰기로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리오는 네루다와 대화를 나누게 되고, 메타포와 인생과 사랑에 대해 배우면서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베아트리체를 사랑하게 된다. 마리오는 시를 이용해 그녀를 유혹하고, 메타포를 통해 표현된 사랑의 감정은 베아트리체에게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이후 마리오와 베아트리체는 결혼하고, 칠레 정부의 추방령이 철회되면서 네루다는 조국으로 돌아간다. 한편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기 위해 섬의 소리를 녹음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네루다는 다시 섬을 찾고, 마리오가 아들 파블리토가 태어나는 걸 보지도 못한 채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마리오는 사회주의 집회에 참여하여 시를 낭송하려고 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네루다는 마리오가 녹음한 섬의 소리를 듣고는, 자기가 그를 위해 무언가 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느끼며 혼자 바닷가를 거닌다.

이 영화에서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왜 자기를 도용했느냐고 야단 친다. 그러자 마리오는 “시란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네루다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우리나라 민중 문학가들의 우상이었다. 그 당시 이 말은 시의 사회적 역할을 의미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네루다는 우정과 사랑의 시인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두 가지 해석은 완전히 다른 것 같지만, 민중을 사랑한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실제로 네루다는 사랑의 시인이었다. 남녀의 사랑과 민중의 사랑은 그의 작품을 탄생시킨 동기였다. 그래서 그의 시는 정치적인 것도 있고, 흔히 볼 수 있는 돌이나 꽃, 새들을 다루면서 사랑을 노래하는 것도 있다.

언젠가부터 시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멀어졌다.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란 무엇일까. 이것은 ‘일 포스티노’의 화두가 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이창동 감독의 ‘시’가 던지는 질문이기도
▲ 송병선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하다. ‘시’는 낡은 서민 아파트에서 손자와 함께 살고 있는 양미자가 동네 문화원을 다니면서 시 쓰는 공부를 시작하고 습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약간의 허영심으로 시작한 것이었지만, 이내 그녀는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을 다시 바라보면서 시상을 찾는다. 그렇게 주인공은 시를 쓰면서 고단한 삶을 위로 받는다.

‘일 포스티노’의 마리오는 시를 통해 우정과 사랑을 얻는다. 그리고 바닷소리를 들으며 시인이 된다. ‘시’의 양미자는 시를 쓰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그렇게 자신의 행복을 만들어간다. 두 작품은 현대에 시가 죽어가는 것은 시를 쓰거나 읽으려는 마음이 죽어가기 때문이며, 그런 마음이 생기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이 떠지고, 시를 통해 행복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송병선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