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카지노

[태화루]소에 대한 명상

2011-02-10     이재명 기자
▲ 김시민 시인
설이지만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다. 구제역 바람이 매서워 어지간하면 고향 방문을 자제해 달라는 눈물어린 호소와 연일 치솟는 물가가 찬바람처럼 일렁여 고향 가는 길이 마냥 설레지 만은 않았다.

“올 때 면사무소 댕겨 오너라, 거기 가서 소독하고 와야 한데이.”

설 연휴 하루 전 날 밤,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당부를 새긴 채 집을 나섰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벗어나자마자 구제역 차량 방역이 실시되더니, 국도, 지방도, 군도의 초입마다 방역이 분수를 이룬다. 고향 마을 입구에서는 차량 탑승자 모두가 내려 15초간 소독실에서 대인 소독을 하는 것으로 구제역 소독의 절정을 맛보았다.

고향에 살고 있는 친구는 사전에 인터넷을 통해 고향 마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방역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그 내용인즉, 구제역 방역 작업을 위해 탑승자가 모두 내려 소독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는데 불쾌해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그리고 수고하시는 그분들을 위해 수고하신다고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네 달라는 얘기였다.

한 밤중에 도착한 고향 마을 입구에서 붉은 제어봉은 차량을 세웠고 나는 사전에 그 내용을 알았기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아이고, 이거 한밤중에도 고생이 많습니다.”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그들이었지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분들 중에는 중학교 동창도 끼어 있었다. 반가운 손잡음이 있었고 이내 나는 내 갈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나에게 있어 소라는 짐승은 동물이 아니라 가족이었다. 또한 대대로 농사를 지어 온 우리 집에서 소는 최고의 농부였다. 길이 잘 든 소 한 마리를 키우기 위해 지극 정성을 다했다. 가난한 우리 집은 어린 송아지 한 마리 살 돈 조차 없었다. 소 한 마리 없이 바쁜 농사철을 맞는다는 것은 농사일을 포기한다는 뜻과 같았다. 궁여지책으로 남의 소를 빌려 쟁기질과 써레질로 논을 고르고 모 낼 수 있는 논을 만드는 것이 아버지의 주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 집, 저 집 사정해서 농우소를 빌려 한해 한해 농사일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어린 송아지 한 마리를 들여 놓으셨다. 코뚜레를 끼우기엔 아직 어렸던, 막 엄마소를 떠나 우리 집에 온 그 송아지를 보는 순간, 우리는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였다. 낯선 집 외양간에 매인 그 송아지는 누렇다 못해 붉은 기운이 감도는 윤기 나는 털을 가졌고 뿔이 막 돋기 시작했지만 이웃집 황소보다 거센 뿔을 가진 힘센 소로 보였다.

낯선 우리 집에 온 그 송아지를 위해 나는 봄물이 막 돋기 시작한 들판에서 푸른 풀들만 골라 뜯었다. 저절로 콧노래가 났다. 꼴망태 한가득 풀을 뜯어 소에게 한줌한줌 입으로 가져다 줄때 그는 순하디 순한 눈을 꿈벅이며 풀을 먹었다. 얼마 후 송아지의 성년식인 코뚜레를 뚫는 일이 있었는데, 그 예쁜 송아지의 코에서 흐르는 피와 울음소리는 어린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농사일이 시작 되었다. 길들지 않는 소를 농우소로 길들이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소의 목에 멍에를 지운 채 엄마는 앞에서 소를 끌고 아버지는 쟁기를 밀어 땅을 파는 일이 며칠씩 이어졌다. 아버지의 ‘이랴, 이랴!’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높아만 갔고 한 번씩 날뛰는 소를 제어하는 엄마의 손목은 더욱 아려 갔다. 소는 소대로 힘에 겨워 숨을 헐떡이며 침마저 질질 흘리곤 했다.

그렇게 봄 여름이 지나고 그 소는 가을일을 넉넉하게 해내는 훌륭한 농우소로 자라게 되었다. 그 가을은 풍요로웠고 이듬해 봄, 우리 집 예쁜 소가 시집을 갔고 나는 꿈꾸었다. 머잖아 송아지가 태어나 그 송아지를 또 큰 소로 키우는 꿈을, 생각만 해도 가슴 뛸 만큼 넉넉한 상상을 했다. 그 상상은 그 해 엄마를 꼭 닮은 송아지를 만나는 현실을 가져다주었다. 마치 예쁜 동생이 태어난 양 기쁨과 의기양양함을 동시에 던져주었다. 송아지는 태어나자 마자 네 다리를 뒤뚱거리더니 곧 일어나 엄마젖을 빨았다.

그 젖을 먹고 송아지가 자라듯 나도 자랐다. 그 소가 논을 갈고 밭을 일군 곡식을 나는 먹었고 그 돈으로 책과 연필을 샀다. 그 송아지를 팔아 등록금을 냈다.

그리고 나는 고향을 떠났다. 먼 타지에서 사는 삶이 그렇게 각박하지 않는 탓도 땅을 밟으며 보낸 어린 시절과 소와 함께 농사일을 하며 깨달은 생명에 대한 마음이 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지금 우리들의 고향은 구제역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방역에 힘쓰시는 분들과 수많은 축산 가족들, 그분들의 마음이 되어보자. 우리는 본디 흙의 자식이었다.

김시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