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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루]나의 이사 약전(略傳)

2011-04-07     이재명 기자
▲ 김시민 시인
나는 믿지 않지만 팔자라는 게 있단다. 어릴 때 아버지는 내 사주에 역마살이 끼어 있다고 했다. 역마살이란 글자 그대로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고 여러 곳으로 떠돌아 다니게 되는 신세를 비유해 말하는 것으로 아는데 농경사회인 이전까지는 살의 성격이 강했다. 이는 근본도 없이 이곳저곳을 떠도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음을 뜻하기도 하고 한곳에 정주하지 못한 채 고된 삶을 살아야 함을 내포하기도 하겠다.

그러나 세계를 내 집처럼 다녀야 하는, 신유목사회인 요즘의 역마살은 오히려 복을 타고났다고 해야 옳은 세상이니 달리 말하면 역마복 이라고 바꾸어 부르면 어떨지 가만히 생각해 보며 웃음을 매단다.

어쨌든, 내 팔자가 그런지 몰라도 나는 숫하게 이사를 다녔다. 그 중 몇 가지만으로 나의 이사 약전을 통해 말한다.

농사일을 하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바깥세상 구경을 하기란 참 힘들었다. 당연히 이사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시절이었고 혹 한번씩 대처로 이사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을 때마다 그들의 빈집을 보며 내가 떠난 빈집은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억할까 생각하곤 했다. 서까래가 내려앉고 마당의 가장자리부터 자라기 시작한 풀들이 마당 한가운데를 뒤덮어 가는 그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은 대청마루에 켜켜이 쌓인 먼지마냥 날렸다.

고등학교를 진학한 후 시작한 자취생활은 나를 드디어 역마살 붙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매 방학 때마다 이 친구 저 친구와 함께,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녔다. 이사의 규모도 단출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불 보따리 하나와 책 몇 권, 석유곤로, 그릇 몇 개를 박스에 담고 리어카를 끌었다. 도합 10번은 넘게 이사를 다녔으니 아마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였다.

시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작한 대학에서의 삶은 더한 기네스북 감이었는데, 동가숙서가식이란 말은 나를 두고 이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 친척, 저 형제 알고 지내는 모든 피붙이들의 신세를 졌다. 학교가 멀고 가까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떡하면 한 몸을 누이고 밥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을까가 당면한 문제였다. 피붙이는 친가 외가 가리지 않았고 아마 장가라도 갔다면 처가댁 오촌 당숙도 찾아다녔을 터였다.

그러다가 학교 도서관과 동아리 방을 내 집으로 알고 지냈다. 밤늦은 시간 학생회관에 있는 동아리 방에 누워서는 이렇게 큰집에서 산다는 것에 은근한 자부심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아리 방에 기생하는 나 같은 녀석이 많았던지 밤 12시 이후 출입구 문을 봉쇄한다는 청천벽력같은 얘기가 돌았을때 내 절망이 얼마나 깊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 일은 유야무야되어 그곳에서 청춘의 한때를 갈무리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콧구멍만한 자취방 같은 신혼집에서 아내는 여름에는 더위에, 겨울에는 추위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연히 아이가 생겼고 아내의 일을 위해 아이의 양육처가 필요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이사를 감행하는데, 아내의 친언니집 바로 맞은편 단칸방이었다. 처음의 신혼집과 별 반 다를 바 없었지만 한가지 크게 발전한 것이 있으니 연탄에서 기름으로 보일러가 바뀌었다. 그것 만 해도 어디인가?

이렇듯 한 도시 내에서 이사를 다니다가 삶의 터전을 또 다른 도시로 바꾸어 이사를 했다.그 동안의 세월이 약간의 살림을 늘게 했는지 작은 포터 한 대 분량에서 포장이사를 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낡은 아파트 1층에 살림을 넣은 첫날,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어느덧 터진 수도 배관을 통해 홍수처럼 내렸다. 이사한 바로 그 첫날 밤, 이 도시는 나에게 폭포수 같은 물을 천장에서 쏟아 부었는데 뮤지컬 맘마미아에서 온천이 터지듯 바닥을 뒤덮는 물세례를 선물 받았다.

물의 기운은 샘솟음을 뜻할까. 하는 일이 생각 보다 잘 풀려 드디어 내 집을 장만하게 되었다.새 아파트로 입주하고 싶었지만 기존의 전셋집에 새 임자가 나타나지 않아 고심하던 나는 이사비용 일부를 준다는 광고를 전봇대에도 아파트 광고판에도 붙였다.

어느 날 아침, 이삿짐을 실은 차 한 대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지금 당장 이사할 수 있나요?” 이삿짐을 싣고 온 그 분은 원래 이사하기로 한 집으로 갔으나 그 집이 이사를 나가지 않는 등 복잡한 문제가 생겨 당장 살 곳이 없는 처지가 되었다가 전봇대에 붙은 광고를 보고 찾아 온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말,

“이사 비용 일부는 당연히 주실 거죠?”

물론 나는 그 날 아침 당장 이사를 했다. 역마살을 띈 나는 그 후로도 3번의 이사를 더 했으니 도합 셀 수가 없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사를 해야 할지 당연히 나도 모른다.

김시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