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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루]봄꽃에 대한 단상

2011-04-14     이재명 기자
▲ 이궁로 시인
지난겨울을 생각하면 올 것 같지 않았던 봄이다. 일찍 핀 봄꽃들은 벌써 지고 벚꽃이 만개하다. 꽃피는 봄은 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단발머리 계집아이 때부터 쌀쌀한 봄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꽃을 따고 나물 캐던 시절, 막연한 사랑을 꿈꾸던 사춘기 시절, 봄꽃에 흔들리던 청춘을 되새김질하게 되니 말이다.

꽃망울이 도드라지는 것은 이제 막 젖가슴에 멍울이 생기기 시작하는 계집아이의 가슴에 새겨지는 사랑에 대한 감정 같다. 누굴 좋아한다고 말 하지도 못한 채 수줍은 얼굴로 혼자서 괜히 얼굴 붉히며 고개 숙이고 걸어가는 계집아이처럼, 꽃망울은 저 혼자 붉어지고 부풀어 올라 누가 볼세라 살며시 꽃잎을 여는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어느 저녁 무렵 아파트 화단 앞을 걸어가고 있는데 붉고 흰빛이 내 시선을 잡아끈다. 나는 밀려오는 어둠을 걷어내 듯 꽃에게로 다가갔다. 작은 매화나무에 맺힌 꽃 봉우리가 막 속살을 내밀기 직전 그 터질 듯한 팽팽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가만히 꽃과 시선을 맞추었다. 꽃이 보내는 시선에는 많은 말들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꽃 피우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겨울이 다 가기도 전에 팽팽히 부풀어 올라 제 몸속 비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뜨거움을 숨기지 못하겠는가. 나는 옴 몸으로 말하는 꽃의 또 다른 말을 알 것 같았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꽃의 마음도 언제나 기원하는 쪽으로 가고 있으며 그 마음은 언젠가는 만개의 날을 보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어떤 꽃에게는 긴 기다림이 필요하기도 하다. 시골의 오일장을 돌며 살아가는 올해 60세인 K씨에게는 무엇보다 꽃이 필요했다. 그이는 오일마다 장이 서는 곳을 찾아다니며 장사를 한다. 한 때는 옷 가게며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그것이 K씨에게 주는 행복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이는 숨 막히듯 지루한 삶보다는 장터가 그 어느 곳 보다 사람냄새가 나는 유일한 곳이라 했다. 때로 어처구니없는 분쟁에 휘말리기도 하지만 오히려 장터만큼 활기찬 곳도 없다는 것이다.

매일 같이 일하는 것도 아니며 적당한 휴식을 할 수도 있고 노천에서 맞는 시골 사람들의 순박함도 빠질 수 없는 매력이라던가? 어쨌든 그이는 그렇게 장터의 삶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 일도 가끔은 회의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면 훌쩍 여행을 떠나 여러 명소를 돌아다니며 기분전환을 하고 봄이면 제일 먼저 피는 꽃을 보고 오면 마음속에 그 꽃을 품고 장터 생활을 견디기가 훨씬 수월하다는 것이다.

간혹 아는 사람이 장터에서 그이를 보고 못 본 척 지나치기도 하며, 뒤에 만나면 ‘당신이 창피해 할까봐 모른 척 지나쳤다’고 넌지시 말하기도 한단다. 그러면 K씨는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에게 호쾌하게 웃으며 그 일이 뭐가 부끄러운가 하고 되레 반문하면 상대방은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못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남에게 부끄럽게 보일까 봐 아무 일도 못하고 남루하게 사는 것보다 얼마나 신나고 행복한 일이냐며 그러한 시선을 일축한다.

K씨는 그렇게 열심히 살아간다. 물론 그이에게도 남에게 뒤지지 않는 안락하게 보낸 세월이 있었으며 견디기 힘든 아픈 세월도 있었다. 장터 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이는 그러한 모든 것을 뛰어 넘고 지금은 그 생활을 즐기고 있다. 나는 오히려 그가 한 송이 꽃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어렵고 힘든 일을 견디면서도 그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밝은 웃음을 가진 사람이니 말이다.

나는 그 저녁 무렵에 본 화단의 매화 꽃망울과 함께 K씨의 모습을 떠올리며 T. S 엘리어트의 ‘황무지’를 가만히 읊조려 본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라일락꽃을 / 죽은 땅에서 피우며, 추억과 /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 활기 없는 뿌리를 일깨운다./ 겨울이 오히려 우리를 따뜻이 해 주었다, 대지를 /망각의 눈(雪)으로 덮고, 마른 구근을 가진 / 작은 생명을 길러주며. /…

꽃이 주는 의미는 이처럼 깊고도 쓸쓸하다. 하여 맨 몸으로 겨울 찬바람을 견뎌내고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매화나무의 일생처럼 우리 사람도 그러할 것이다.

이궁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