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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루]고향 이야기

2011-05-18     이재명 기자
▲ 이궁로 시인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둔다는 뜻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말을 이르는 말이다. 요즘은 교통이 발달해서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시절이지만 마음처럼 그리 자주 가지 못한 채 늘 그리워만 하는 곳이 고향이다.

사월의 마지막 주에 막내 동생의 결혼이 있어 고향을 다녀왔다. 평소엔 고향에 가도 친구나 친지들을 만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늘 볼일만 보고 허겁지겁 현재의 생활 터전으로 돌아오기 바빴으니까. 이렇게 집안의 행사나 되어야 고향의 친지나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서로 오랜만의 해후를 즐기며 따뜻하고 즐거운 웃음을 주고받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고향친구를 만나면 나는 친족 같은 느낌을 받는다. 고향에 들를 때면 반겨주는 친구들은 자신들이 무슨 언니, 오빠라도 되는 양 품어준다. 누가 시킨 것도 무슨 의무도 아니건만 그 친구들은 두 팔을 벌려 다정히 맞아주는 것이다.

이번엔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도 있었다. 30여년만의 해후다. 우리가 서로 청춘을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다들 한때는 방황과 좌절 그리고 고뇌로 무거웠던 젊은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무심히 세월이 흘러갔고, 그런 세월의 이야기는 밤을 새워도 못 다 할 만큼 쌓여 웃음과 공감이 넘쳤다. 사춘기 짝사랑 얘기는 중년의 나이에도 처음 듣는 것처럼 부끄럽고 아름다웠다.

인기가 많았던 친구는 그 시절 구애하던 아이들의 눈빛이 무서웠다고 한다. 결혼하여 아들을 키워보니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의 그 눈빛을 이해 하겠더라며 웃는다. 랭보의 시처럼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만 지나온 세월이 상처투성이 일지라도 지나고 나면 그것도 우리를 키운 원동력이었으리라.

개구쟁이짓과 말괄량이짓을 하며 사춘기를 보내던 그 형형하게 빛나던 야생의 얼굴들은 다 어디로 가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같은 한 시절을 초월한 편안하고 그윽한 얼굴들을 보니 세월이 사람을 키운다는 말이 실감났다.

어떤 시기는 식물처럼 씨를 뿌리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한쪽으로 만 굽어갈 때 그때 지지대를 마련해주어도 늦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자라 온 것처럼, 세상이 우리를 기다려 준 것처럼. 고향도 우리를 키우고 기다려 주었다.

가끔 사는 것이 고독하고 외로울 때 ‘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눅눅했던 마음이 갑자기 푸르고 맑은 하늘처럼 환해지는 것이다.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하던 젊은 날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들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젊어서는 잘 모르던 느낌이다. 이제 중년이 되니 알 것 같다.

이렇듯 점점 나이가 들수록 고향에 대한 향수가 깊어지는 것은 사람마다 다 같은 마음인가 보다. 이번 고향 길에서 이모께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나의 친정 건너 마을 한 집에서, 어려서부터 머슴 살던 사람이 장년이 되어 주인집을 떠나 객지를 떠돌다, 가족이 없이 노년이 되어 그 주인집을 다시 찾아왔다. 그에게는 그곳이 고향이었다. 그가 모시던 주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그 집에서 죽기를 바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가 돌아와 머슴 살던 그 집을 수리하던 중 집이 무너져 그는 그 밑에 깔려 죽고 말았다. 그의 원대로 그 집에 죽었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고 자연사 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집에 깔려 죽었으니 불행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원하던 고향집에서 일생을 마감한 셈이다. 나는 그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수구초심이란 말이 이해되던 순간이다.

고향은 그런 곳이다. 거칠었던 길고 긴 삶도 아무런 조건 없이 보듬어주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거울이 되어 주며, 죽음을 받아주는 곳. 나는 가만히 앉아서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고향 쪽 하늘에도 비가 오겠지.

이궁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