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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수필]가을소풍

간월재가 가까워질수록...가을 산의 정취가
조금씩 퇴색됨은 왜 일까

2011-11-03     정명숙 기자
▲ 이동웅 전 울산여자고등학교 교장
이른 새벽, 서쪽 하늘에 떠 있는 하현달을 시계 삼아 가을 소풍을 떠난다. 목적지는 간월재를 거쳐 신불산(1208)이다. 예나 지금이나 소풍의 설렘과 추억은 아련하다. 어릴 적 소풍은 반나절이 되어야 출발이지만 우리 나이엔 새벽잠이 없어 이렇게 일찍 출발한다. 이른 시간엔 찻길, 산행 길 모두 한산하여 참 좋다. 준비물도 초등학교 땐 도시락에 오이 두개 달걀 하나면 충분하다. 오늘은 아침식사 대용으로 물 한병에 과일과 찰떡 조금이다.

작천정을 지나 신불산 간월산장에 주차를 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희뿌옇게나마 키 작은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며 우릴 반긴다. 홍류폭포를 지나면서 가을이 들려주는 진한 소리에 취해 잠시 발길을 멈춘다.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각양각색의 산꽃들이 제 색을 내며 빛을 발한다. 산이 가을에 더 아름다운 건 이렇게 눈부신 제각각의 색깔을 품고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20대 후반 언양에 근무했을 때는 한 달에 한번쯤은 이곳을 찾았었는데, 이 나이에 다시 찾은 감회가 새롭다. 오늘은 더 많은 추억을 담아가야지.

산 아래 능선엔 성질 급한 나무들이 수줍은 듯 살며시 가을 색을 선보였지만, 정상을 향해 가파른 계곡을 오를수록 단풍의 색깔은 더 곱고 아름답다. “바스락 바스락” 소리를 내며 발밑에 밟히는 마른 잎의 소리와 감촉이 참 좋다. “어쩌다 잘못되어 물에 젖은 낙엽 신세는 되지 않아야 하는데” 하며 아내 얼굴을 훔쳐본다.

성큼 다가온 가을 앞에 곱게 단풍 든 아름다운 산, 맑은 계곡 물소리가 가슴을 고동치게 한다. 불쑥 다람쥐 한 마리가 길을 안내하듯 우리 앞을 지나 사라졌다. 길가 하얀 국화꽃엔 작은 벌 한 마리 꿀을 따느라 분주하다. 향기로운 꽃은 아무리 깊은 산속에 있어도 벌과 나비가 찾아 주는구나.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이다. 잠시 속세를 떠나 부질없는 근심걱정 벗어던지니 심신이 평안하다. 감사와 미안함, 비움과 채움, 청춘과 사랑, 이해와 용서 모두가 가득하다.

이 가을의 한가운데 서서 잠시 심호흡하면서 저 아래 지나온 삶의 흔적을 돌아본다. 빛바랜 흑백사진이다. 옛 흑백 영상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만큼 여기 이 자리에 함께한 순간이 감사하다. 그러나 모두에게 참 많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다. 자연처럼 살아야하는데….

간월재에 가까이 이르면서 가을 산의 정취가 조금씩 퇴색되어감은 왜 일까. 우리가 좀 더 편하자고 자연을 훼손하여 만든 여러 갈래의 도로며 시설물들이 곧 속세이다. 20년 전만해도 산행 중에 간식거리로 즐겨 따먹었던 머루, 다래, 으름이 사라진지 오래다. 더욱이나 케이블카를 설치해야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니 걱정이다. 산이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린다면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아야할 근본적인 가치마저 상실하는 결과가 되어버리고 만다. 많은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주는 것은 좋겠으나 적절함을 찾아내는 노력이 아쉽다.

신불산 정상, 수십만평의 억새밭이 느른 가슴으로 우릴 반긴다. 바람 따라 이리저리 일렁이는 은빛 억새 향연이 장관이다. 대자연 앞에 인간은 이렇게 초라하고 소박해지는가보다.

오래만의 가을 소풍, 새로운 풍경이 거듭하여 진한 감동을 주었다. 역시 가을을 가을답게 느끼려면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연과 함께하는 순간 모든 걸 다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얼마 있지 않아 펼쳐질 만산홍엽의 향연에 다시 한번 소풍계획을 잡아봐야겠다.

이동웅 전 울산여자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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