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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수필]기개있는 삶을 산 황·진·이

가식 없고 권력에 굴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은 해냈던
거침없는 삶을 산 ‘자유인’

2012-01-12     정명숙 기자
▲ 박해양 지산주택 대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인 황진이, 수백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우리들 가슴 속에 남아 그의 이름으로 만든 노래가 뭇 사람들로부터 애창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마도 가식 없고, 탐심 없고, 금욕과 권력에 굴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은 해냈던 거침없는 삶과 대담한 용기에 대한 외경심이 아닐까. 올바른 판단과 의리 있는 삶의 방식 때문에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의 삶을 되짚어 보는 일은 언제나 설렌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사르트르와 작가인 보부아르는 작품 못지않게 계약결혼으로 멋진 삶을 살았다하여 더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이들은 겉으로는 이상적이었지만 그 이면은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각자 자기의 연인들을 침실로 불러들였고, 사르트르는 말년에 고독하게 혼자 살았다. 그런데 마치 평생을 이상적이고 완벽한 부부로 살았던 것처럼 미화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황진이와 이사종의 계약동거는 이들보다 약 500여 년 앞선 조선 중종 때의 일이다. 황진이는 당시의 명창이자 선진관이었던 이사종을 만나게 되자 그가 풍류를 제대로 아는 사람임을 알아보고 거침없는 용기와 고차적인 장난기로서 먼저 6년간의 동거를 제안했다. 이들의 동거는 미루어 짐작컨대 진실하고 이상적이었다. 황진이는 6년의 계약결혼 후 이사종과 헤어지고는 다시 노류장화의 기생으로서 충실했다. 미모와 재능만큼 콧대도 의리에서도 당당했다.

그는 비록 기생이었지만 남자들과의 사랑이나 만남에 있어서는 오롯이 진심으로 접근했다. 돈이나 벼슬로 평하지 아니했다. 기생이 된 이유도 자기 때문에 상사병으로 죽은 총각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으며 소양곡을 사랑한 것도 그가 대제학을 지낸 대단한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시인끼리의 사랑이었으며 이 정승의 아들 이생을 사랑한 것은 이생의 인품이 친구로 삼을 만하여서이고, 명문귀족의 아들이 아닌 친구로서 금강산 유랑의 동행으로 삼았던 것이다. 금강산 유람 당시 이생의 끼니를 위해 몸을 팔기도 했는가 하면, 치마폭에다 숱한 남자를 상대로 마음껏 희롱하였으나 사람들은 욕하지 않고, 멋지고 기개 높은 여장부로 여겨 사모했다. 또한 기생을 인간이 아닌 엽색의 노리개로 여기는 남성들에 대한 분노로 30년 면벽 수도하여 생불(生佛)이 된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고 경멸하여 미련 없이 버리기도 했다. 황진이는 하고자하는 것을 당연히 하되, 은밀하게 가식과 위선으로는 하지 않았다.

송면앙정 즉 송순을 사랑한 것은 가인으로서 가인을 사랑한 것이며 서화담를 좋아한 것은 인품과 학덕 때문이지 않은가. 아무리 유혹해도 군자의 의연함을 잃지 않는 서경덕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황진이는 서화담, 박연폭포, 그리고 자기를 송도삼절이라고 하는 오만의 극치를 보이기도 했다. 사랑과 존경할만한 사람에게는 신의와 그리움을 계속 하였지만, 가식과 위선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짓궂은 장난도 서슴지 않았다. 한양선비 벽계수의 가식을 벗겨 보이기 위해 ‘청산리(靑山裡)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라 읊었다. 황진이의 이 시를 듣는 순간 벽계수가 감탄하여 타고 있던 당나귀 등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는가 하면, 품고 있던 연정을 이루지도 못하고 줄행랑쳤다는 것이다.

백호 임제는 평양감사 부임길에 황진이 무덤에 들러 생전에 만나지 못했음을 한탄하면서 그 유명한 시 즉, 중학교 국어교과서(70~80년대)에 수록된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라는 이 시를 황진이 무덤에 받치고 난 후 사대부의 체통과 막중권신으로서, 백성을 지도하는 두령으로서 일개 기생의 무덤에 술 따르며 애도했다고 하여 조정으로부터 체직되어 평생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송도를 떠돌았다.

천한 기생에 불과했던 황진이, 하지만 그는 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남기며 멋진 자유인으로 지금까지 우리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아마도 그 이유를 그의 죽음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삶이 온당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하여 후세의 여성들에게 경계를 삼기 위해 자신이 죽거든 행인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묻고, 뭇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했다지 않는가. 눈에 보이는 것에만 현혹되어 있는 듯한 이 시대, 새삼 황진이의 의리와 기개가 그립다.

박해양 지산주택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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