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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금요일]가요무대 - 이기헌

2012-02-16     경상일보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밤 열한 시가 넘어가는 노점통
여자들은 꾸물꾸물한 어둠 밑에서
가요무대를 듣는다
질긴 하루를 덮어야 할 시간
뭔가에 취한 남자는 평상에서 잠들었다
야채를 판들 무엇 할 것이며
생선을 판들 무엇 할 것이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무지 의미가 없다
술에 젖어 잠드는 것도 틀릴 것 없는 장거리
가요무대는 쉼 없이 노래를 부른다
얼굴에 웃음이 사라진 세월
누군가 들을까봐 새앙쥐만한 목소리로
낭랑 십팔 세를 따라 부르는 여자들
아나운서가 대신해서
노점 아줌마들의 가게 문을 닫아준다

■ 이기헌 시인은
1958년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학교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7년 졸업기념 자작 시집 <서울 무지개>를 펴냄. 이레천지 동인. 시집으로 <고깔모자 피자가게>가 있다.


시인 자신이 상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저자거리에서 본 삶의 추적은 어떤 모습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일까.
▲ 이기철 시인

이기헌 시인의 시는 한 번도, 아니 한 발짝도 이 공간을 벗어난 적이 없다. 대형마켓들이 들어선다는 흉흉한 소문들이 난무하는 세태에서도 그는 절망을 희망삼아 사는 이들의 모습을 클로즈업한다.

‘질긴 하루를 덮어야 할 시간’임에도 쉬 ‘가게 문을’ 닫지 못하는 상인들. 그들의 하루를 셈하는 시간은 이미 훌쩍 넘어버렸지만 왠지 서글픈 심정만은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야채를 판들’ ‘생선을 판들’ 시들한, 그래서 ‘얼굴에 웃음’은커녕 긴 그림자만 시장 바닥을 채운다. 하지만 판을 엎을 수는 없는 일. 짐짓 ‘가요무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자락을 위안삼아 겨우 ‘가게 문’을 닫는다.

이기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