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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금요일]너라고 쓴다 - 정윤천

2012-03-08     경상일보
솜꽃인 양 날아와 가슴엔 듯 내려앉기까지의
아득했을 거리를 너라고 부른다

기러기 한 떼를 다 날려 보낸 뒤에도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
저처럼의 하늘을 너라고 여긴다

그날부턴 당신의 등 뒤로 바라보이던 한참의 배후를
너라고 느낀다

더는 기다리는 일을 견딜 수 없어서, 내가 먼저 나서고야 만
이아침의 먼 길을 너라고 한다

직지사가 바라보이던 담장 앞까지 왔다가, 그 앞에서
돌아선 어느 하룻날의 사연을 너라고 믿는다

생이 한 번쯤은 더 이상 직진할 수 없는 모퉁이를 도는 동안
네가 있는 시간 속으로만 내가 있어도 되는

마음의 이런 순간을 너라고 이름 붙여주고 나면
불현듯 어디에도 돌아갈 곳이라곤 사라져버려선

사방에서 사방으로 눈이라도 멀 것만 같은
이 저녁의 황홀을 너라고 쓰기로 한다.

■ 정윤천 시인은
1960년 전남 화순 출생. 1990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1년 계간지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의 지평’ 동인. 계간 <시와 사람> 편집위원.
시집으로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흰 길이 떠올랐다> <구석> 등이 있다.

‘너’에 대한 감정이입은 수많은 곳에서 느닷없이 나타난다. 나이를 불문하고 살아온 길이만큼 차곡차곡 쌓인다.
▲ 이기철 시인

‘나’라고 쓰지 않고 ‘너라고’ 쓰는 순간, ‘사방에서 사방으로’ 물들어가는 ‘황홀’을 경험한다. 참 그러고 보니 무던히도 상대방을 무심하게 대했던 일들이 눈에 자꾸 밟힌다.

인간이란 동물은 늘 후회를 달고 살기 마련이라지만 오늘만큼은 ‘나’를 버리고 ‘너’에게로 가고 싶다.

이기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