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금요일]소울메이트 - 이근화
2012-04-19 경상일보
골목에 서서 비를 맞는다
젖을 줄 알면서
옷을 다 챙겨 입고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잃어버렸던
비의 기억을 되돌려주기 위해
흠뻑 젖을 때까지
흰 장르가 돌 때까지
비의 감정을 배운다
단지 이 세계가 좋아서
비의 기억으로 골목이 넘치고
비의 나쁜 기억으로
발이 퉁퉁 붇는다
외투를 입고 구두끈을 고쳐맨다
우리는 우리가 좋을 세계에서
흠뻑 젖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골목에 서서 비의 냄새를 훔친다.
■ 이근화 시인은
1976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4년 현대문학에 ‘칸트의 동물원’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윤동주상 젊은 작가상, 김준성 문학상 수상. ‘천몽’ 동인. 시집으로 <우리들의 진화> <칸트의 동물원> 등이 있다.
바보 같은 결정 탓에 종종 난감한 경우를 당한다. 결국 그러한 일은 모두 오롯이 나의 판단 때문인데 그래도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위로한다.
왜나면 ‘이 세계가 좋아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꺼이 하지 않아도 될, 누가 시키지도 않은 ‘젖을 줄 알면서’도 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구두끈을 고쳐’매는 것만으로도 이러한 결심은 유효하다.
두려워하지 말 일이다. 세상의 일들은 무엇이든 ‘흠뻑’ 젖지 않고서는 제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젖는다는 것은 서러운 일이 아니라 그 설움의 중심에 있는 것이므로 오히려 구원이다.
이기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