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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수필]광해군

2012-06-13     경상일보
▲ 강걸수 북구의회 사무과장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폐륜의 군주로 알려져 있는 광해군도 이 때문에 많은 오해를 받고 있지 않나 싶다. 영창대군을 증살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는 것이 역모의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의 역사학자들은 이는 인조반정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명분이지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떻든 광해군은 북인과 서인간의 당파싸움에서 희생된 비운의 폐주였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는 없는 것 같다.

조선 왕조 오백년사를 보면, 왕으로 등극하면 맨 먼저 왕권 강화작업에 들어갔다.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는 한 치도 소홀함이 없었다. 광해군은 서인들이 난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진압하지 못했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광해군은 폭군의 기질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광해군은 세자 책봉때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왕위에 올랐지만, 왕위 계승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그 중심엔 선조의 적출인 영창대군과 친형인 임해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준비된 왕이었다. 임진왜란때 분조 임무를 기대 이상으로 잘 해내 조정은 물론 백성들에게 큰 신망을 얻는 등 세자 역할들을 충실히 해냈다. 전란으로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또 다시 전쟁터에 내몰지 않기 위하여 평화주의 노선을 택했고, 농민의 세금 경감을 위하여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새로운 민생정치를 펼쳐 나갔다.

이웃 중국에서는 명·청의 교체기로서 국내외 정치상황이 복잡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을 두고 중립외교를 펼치면서 자신의 정치노선을 끌고 가다 한순간에 권좌에서 밀려났다. 쿠데타에 성공한 이들은 광해군의 치적을 철저히 폄하하고 은폐했다. 하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은 전란을 피하게 한 군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광해군은 거듭되는 상소를 물리치고 명나라와 신흥 강국인 후금을 서로 견제하는 탁월한 외교력을 펼쳤다. 그 결과 광해군의 집권기에는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가 계속 유지되었더라면 대명관계도 청산되고 국력도 신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 한반도의 국내·외 정세는 광해군시대 이상으로 복잡하게 변해가고 있다. 북핵문제 등 분단국가로서의 풀어야 할 숙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있는 역사는 우리들에게 산교육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실패한다고 했다. 역사는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강걸수 북구의회 사무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