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카지노

[독자수필]기다려지는 모임, 그리운 얼굴들

2012-09-03     정명숙 기자
▲ 이동웅 전 울산여자고등학교 교장

달력에 표시된 여러 모임 중에서도 가장 기다려지는 모임은 역시 동기회 모임이다. 짝사랑 하던 옛 애인의 답장을 기다리듯 그 시간이 기다려진다. 오늘은 고등학교 동기회 모임이다. 그래도 젊었을 때에는 앞만 보고 살다보니 바쁘다는 핑계로 참석도 제대로 못했는데, 오늘은 서둘러 핸들을 잡았다.

그때 그 시절 그 사람 그 추억들이 삼삼하게 차창에 아른 거린다. 아쉽게도 하나, 둘 이승을 떠난 얼굴들이며, 몸이 불편해 요양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안타까운 얼굴이며, 이젠 소식을 알 수 없는 인연이며, 배고픈 시절 이맘때 쯤 친구 집 복숭아 밭 서리를 하다 붙잡혀 함께 훈계를 받든 얼굴들이며, 심지어는 추운 겨울방학 밤에 이웃마을 친구 집의 닭장을 뒤져 밤새도록 닭죽을 끓여 먹었던, 지금 같으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사건들이며….

이미 작고 하셨지만 자기 자식처럼 저희들을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하신 훌륭하신 선생님들의 온화한 모습들이 차창에 선명하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최근의 일 보다 지난 어릴 적 일들이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모두들 인생계급장에, 반백에 그 모습은 흑백사진이지만 말투와 억양은 더 짱짱하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사회를 위해 헌신 봉사하면서 책무를 완수했기에 자신감에 넘치는가보다. 그 기운이 방안에 가득하다. 내 눈가에도 온기가 촉촉히 묻어나는 것 같다.

우리나라도 어느새 고령화사회에 접어들었다고 대책을 세운다고 야단들인데, 이처럼 당당한 친구들을 보니 사회안전망만 제대로 구축된다면 그리 문제가 될 것도 없지 싶다.

오늘 우리가 따뜻한 밥을 배불리 먹고 편안한 잠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60, 70대 이후의 부모들의 피로하고 남루한 악착같은 삶 덕분일 것이다. 그들의 헌신과 열성에 새삼 감사의 마음이 더해진다. 금융과 유로위기를 겪으면서 청년실업과 불황에 지금 많은 젊은이들이 그토록 못살겠다고 야단이지만 우리 오천 년 역사에 이토록 배부르고 평화로웠던 시대는 없지 않는가.

60이 넘으면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꼭 같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격식과 체면도 내려놓고, 욕심도 비워두고, 그때의 그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옛 개구쟁이 시절 이야기가 이어진다. 건강하게 멋지게 참 잘 살아구나. 우린 조금 늙어버린 것뿐이고, 잘 익은 포도주처럼 우린 조금 더 사람다워지고 있는 것이다. 20, 30대 젊은 청춘이 조금도 부럽지 않다는 당당함이 묻어난다. ‘고령화 사회’ 운운하지만 집안에 어른이 건재하기에 밥상머리 교육이 이루어지고 가정이 중심을 잡아가는 게 아닌가.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돌아봐줄 친구가 단 한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은 행복하고 성공한 인생을 산다고 하는데,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 당당하고 건강한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누가 뭐래도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오전에 시작된 모임이 통 큰 지갑을 열어 앞 다투어 기쁨조 역할을 하니, 푸짐한 해산물이 속달로 배달되어 저녁까지 해결하고 나니 석양이 대운산을 물들이고 있다.

금은보화 호화저택이 이렇게 그리운 얼굴을 보는 것보다 행복하진 못할 것이다. 이 좋은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친구와 선생님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이야기 할 수 있으니, 우리 모두는 행복하고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직도 직장에 나가는 여자동기생이 총무를 맡아 모임이 이렇게 활기차고 더욱 애착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오래 오래 함께 할 수 있길 바라며, 다음 모임에선 또 어떤 모습일까 기다려진다.

이동웅 전 울산여자고등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