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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고종독살과 민족의 자존심

2012-09-10     정명숙 기자
▲ 박해양 지산주택 대표이사

일제 강제징용사건, 위안부사건, 2차대전당시 젊은 조선인들을 총알받이로 삼았던 천인공로할 잘못을 저지르고도 사과한마디 없이 오히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망언을 일삼는 일본의 치졸함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 그래서 고종황제의 독살 만행을 알리고자 한다.

1905년 10월말 대한제국을 보호국화 한다는 명목으로 강제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11월9일 서울에 온 이토히로부미는 다음날 경운궁으로 고종을 방문해 대한제국을 보호국화 하겠다는 소위 천황의 친서를 전달한다. 당시 일본공사였던 하야시가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종34년에 일어난 순종의 독차 사건도, 고종과 황태자가 즐겨 마시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어 시해하려던 사건은 친러파가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일제의 사주를 받고 친일파가 개입했을 개연성이 매우 농후하다. 하나 그 어느 쪽이든 간에 궁내의 간자가 개입한 것은 분명하다. 이때 커피맛에 익숙한 고종은 곧 뱉아 버렸으나 황태자, 즉 순종은 다량의 커피를 마신 탓에 지적장애를 일으켜 판단 능력을 잃게 되었다.

이것도 모자라 1905년 11월17일 일본 1개대대 포병중대 기병연대가 대궐앞 종로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동안 대궐안에서는 이른바 을사오적에 의해 고종의 서명날인 없이 을사보호조약(2차 한일협약)이 강제 조인되었다. 을사보호 강제 조약이 체결되고 난후 좌절하지 않고 비밀리에 런던(트리뷴)의 기자인 스토리에게 옥쇄가 찍힌 국서를 주어 영국에 전하게 했다. 고종은 이 국서에서 황제인 자신은 을사보호조약을 승인한 사실이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세계 열강이 5년동안 대한제국을 공동으로 보호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 국서는 1905년 12월6일 트리뷴지에 실리게 되었고 1906년 1월16일에는 대한매일 신보에도 게재되었다. 이 매력적인 제안에도 열강들이 반응이 없자 고종은 포기하지 않고 1907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감사 이준, 전 주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을 6~7월 2차 세계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로 파견했다, 그러나 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의 넬리도프는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어느 열강 대표도 이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일본의 이토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꼬투리잡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킬 호재로 삼아 만고의 역적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함께 7월16~17일 두차례에 걸쳐 양위 주청을 했지만 고종은 대노하면서 이를 거부했다. 다음날 고종이 거부하는데도 경운경 궁화전에서 이토와 이완용에 의하여 황제 양위식이 강행되었고, 이 당시 양위하는 고종은 물론 양위받은 손종 모두 참석하지 않은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수 없는 희한한 양위식이 벌어졌다.

또한 한일합방이 고종의 자의로 체결되었다는 일본의 주장이 허구성으로 만천하에 드러나자 이전의 의병 투쟁과는 비교할수 없는 독립운동의 거센 물결이 국내외에서 일어났다. 1918년 다시 고종의 해외망명이 추진되었고, 일본의 간악한 무리들은 고종의 해외망명을 저지하기 위해 1919년 1월20일 묘시(오전 6시)에 독살하기에 이른다. 순종실록 부록에 태왕(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고종의 병명도 없이 그저 태왕의 병이 깊어 그날 동경에 있던 왕세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되어 있다.(그날이 바로 1919년 1월20일이다) 문제는 그날 밤 숙직한 인물이 바로 일본으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은 만고의 역적 친일파 이완용과 이기용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음날 묘시(오전6시)에 고종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고종이 1월20일에 사망했는지 아니면 고종실록의 기록대로 21일에 사망했는지 불분명하며, 사망 발표 방식도 신문호외를 통한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일제가 조선총독부 칙령 제9호로 이 태왕이 돌아가셨으므로 오늘부터 3일간 가무음곡을 중지한다고 결정한 것은 1주일 지난 뒤인 1월27일이었다. 이증복은 1958년 12월 16~19일자 연합신문에 1918년 12월19일 밤에 두 한씨가 식혜에 독약을 넣어 고종을 독살했다고 적고 있다. 일제로부터 지령을 받은 이왕직 장시국장이자 남작 직위를 받은 한창수와 시종관 한상학이 독살했다는 것이다.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 민씨가 살해됨으로써 을미의병이 일어났고 고종의 독살로 3·1운동이 발발했으니 이것은 18년간 존속했던 조선인의 마지막 의리와 예우인지도 모른다. 정치인들은 정쟁만 일삼을 것이 아니라 민족자존심을 세우는 입법을 추진해야 마땅할 것이다.

박해양 지산주택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