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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다가가는 남성열전]하늘은 높고 물은 맑다

71. 태종 무열왕 김춘추

2012-10-02     이재명 기자
▲ 삽화=화가 박종민

김춘추, 그는 준비한 왕이었다. 아랫사람을 거룩하게 보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다 죽은 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마음 따뜻한 왕이었다. 왕이라고 다 그러하지 않았기에 그를 위대한 왕으로 기억한다.

왕이 되기까지 김춘추가 가장 크게 준비한 것은 사람이었고, 왕이 되어서 그가 가장 잘한 것도 사람을 쓰는 일이었다.

하늘은 높고 물은 맑다. 경주의 가을은 참으로 고즈넉하고도 아름다울 따름이다. 천년 전 신라의 하늘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가까이 한 시간 안에 닿을 수 있는 천년고도 경주가 있다는 사실이 울산에 사는 즐거움의 하나다.

점점 삭막해져 가는 우리네 심성은 신라의 숨결에 닿으면 가슴은 촉촉하게 젖고 마음은 부풀어 오른다.

가을날 해질 무렵 무열왕릉을 걷는다. 고요와 침묵이 흐른다. 서해 뱃길로 당나라를 오가며 신라의 통일 기반을 이룩한 태종 무열왕도 흙무덤 속의 주인이 되어 고요를 누리고 있을 따름이다.

김춘추는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였기에 성골에서 진골로 족강(族降)되었다. 왕이 되기엔 한참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왕위로 다가가는 일에 한시도 게으르지 않았다.

진골 신분의 불리함을 딛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제위 기간을 지켜가며 세상을 떠나고 나서 화백회의에선 상대등 알천(閼川)을 추천하였으나 알천이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으니, 김춘추 공을 추천합니다.” 하며 사양하는 데다, 대세가 김유신을 등에 업은 춘추에게 기울어져 51세의 나이로 등극하였다.

그만큼 오래 준비한 왕이었다. 일할 시간이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으며, 51세는 결코 젊은 나이가 아니란 것도 그는 깨닫고 있었다.

그로서는 서둘러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왕위계승의 합법성과 정당성의 확보였다. 즉위한 다음 해 바로 아들 법민(法敏)을 태자에 책봉하였다.

더불어 가까운 일족을 요직에 두루 등용하였다.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고서는 드디어 그는 안심하였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의 결혼 이야기는 삼국통일의 기반이 되는 동기가 된다. 김유신은 김춘추와 축국을 하다가 옷깃을 밟아 찢어 놓는데, 유신은 춘추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여동생 보희에게 옷을 꿰매게 했으나 보희는 사양하고 동생 문희가 춘추의 옷을 뛔매면서 둘의 인연이 맺어지게 하였다.

문희가 언니 보희의 꿈을 비단 치마를 주고 사고 난 뒤에 있었던 일이다. 문희는 결국 무열왕의 왕비가 되고 보희는 무열왕의 후궁이 되었다. 문희가 낳은 아들 법민은 30대 문무왕이 되고 그녀의 혈통이 삼국을 완벽하게 통일하였다.

김춘추는 선덕여왕 때부터 죽음을 무릅쓰고 고구려와 당에 외교임무를 띠고 다녔으며, 무열왕이 즉위할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연합하여 신라를 노리고 있었고, 일본마저 백제와 연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신라의 희망이라곤 멀리 떨어져 있는 당나라의 군대를 요청하는 수 뿐이었다.
 

▲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재위 7년째인 660년,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백제 정벌에 성공하였으나, 고구려까지 통합하는 삼국통일의 대업은 기틀을 잡는 선에서 아들인 문무왕에게 물려주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인연은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때로는 그 인연으로 슬프고 고통스럽기도 하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인연은 신라통일로 이어진 계기가 된 것이다.

어둠의 적막은 밀려나고 고요함이 엄습해 온다. 무열왕릉을 거닐며 왕의 자리를 만들어 갔던 김춘추의 의지에 감동한다. 돌아 올 때는 삼릉을 거쳐 치술령으로 해서 돌아온다. 신라의 달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