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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다가가는 남성열전]죽어도 좋을 사랑

75. 김유정

2012-11-27     이재명 기자
▲ 삽화=화가 박종민

사랑은 축복이다. 신이 내린 선물이며, 청춘의 용오름이고, 젊음의 거대한 해일이다.

사랑은 빛의 바다위에 떠오르는 궁성이며, 운명이며 당초부터 숙명이며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사랑은 감성으로 숨을 쉰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줄게 없는 사랑인데도 주는 것이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주는 것이다. 주머니 속 먼지 묻은 사탕 한 알을 꺼내 쥐어주는 것도, 더 이상 안아 줄 힘이 없을 때 온몸을 받쳐 업어주는 것도 또한 지극한 사랑이다.

겨울 안개 자욱하고 초겨울의 밤공기는 촉촉이 익어간다. 지극히 고요한가 했더니, 어느새 가냘픈 빗소리가 듣는다. 잎을 다 버린 겨울나무는 아름답게 침묵한다. 겨울비다 처연히 비를 맞고 걷는다.

이 비를 맞고 나무는 봄의 향기를 담을 것이고, 나는 찬비에 몸을 적시며 걷는다. 가슴은 이미 적당히 식었고, 머리도 온 몸도 싸늘히 비에 젖고 눈물 같기도 빗물 같기도 한, 겨울밤을 혼자 걷는다.

눈물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이 나에겐 사치스럽고 먼 곳의 풍경 같기만 하더니 새삼 오늘밤 눈물이라니 찬비 맞으며 어둠 속을 그냥 걷는다.

누구라도 한때는 끓어 넘치는 용광로였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냉철한 이성의 바탕위에서 만 꽃 피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사랑일수록 사랑은 죽음이며, 고통이며 형벌일 수도 있다. 그림 속에서 문학 속에서도 사랑은 그렇게 왔던 것이다.

소설 <봄봄>, <동백꽃>으로 유명한 김유정은 당대 최고의 명창 박녹주에게 열렬한 구애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결혼한 데다 또한 기생이었다. 학생과 기생이 만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며 녹주는 그를 물리쳤다. 혈서까지 써 보냈으나 가난한 학생 김유정은 녹주의 마음을 뺏을 수가 없었다.

하고 많은 여성 가운데서 하필이면 임자 있는 사람을, 그것도 기생에 손바닥 마주치지 못하는 짝사랑에 목을 매었을까.

그게 그의 운명이었다. 그에게서 소설 쓰기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쓰라린 기억, 암울한 시대 상황, 정신적 고립감, 이 모든 시름과 고뇌, 우울과 절망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몸짓이었다.

그는 폐렴과 결핵을 앓고 있었다. 가난하여 약을 쓰지 못하였다. 닭 삼십 마리와 살모사 열서너 마리만 고아먹으면 나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몸 속에 고름이 꽉 차 있을 건데 그렇게 해서 고름을 처치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돈을 구해 볼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탐정소설을 번역하는 수 밖에 없었다. 밤을 세워가며 탐정소설 번역을 하는데 온몸이 식은 땀에 젖었다.
 

▲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김유정은 제 몸의 생명력이 서서히 꺼져가는 걸 스스로 느꼈다. 닭 서른마리와 살모사 열 마리를 고아먹고 회복해 보기위해 밤을 세워가며 탐정 소설 번역 일을 하는데 통증이 밀려왔다.

치질마저 악화되어 홍문의 통증은 너무도 심했다. 어찌할 수 없었다. 가래가 끓고 기침이 잦아지더니, 그날 새벽에 탐정소설 번역도 끝내지 못하고서 세상과 이별하고 말았다. 그렇게 원하던 약도 한번 써 보지 못하고서 29살 나이 싱싱한 젊음을 버리고 혈서를 바치던 짝사랑도, 모두 버리고 그냥 세상도 벗어 버렸다.

겨울 비 속을 걸으며 죽어도 좋을 사랑, 한 여인을 죽도록 사랑한 소설가의 사랑을 찬비로 듣는다. 남의 사랑이야기에 나는 왜 덩달아 우는지, 울어야 하는지 자신도 모르겠다. 그냥 걷는다. 겨울비가 뜨겁다.

그의 소설 속에 주인공들만 살아서 한국 소설문학사에 쩌렁쩌렁 그 목소리가 높다.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