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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다가가는 남성열전]마음은 이미 미인 따라 떠나고

79. 화담 서경덕(徐敬德·1489~1546)

2013-01-22     이재명 기자
▲ 삽화=화가 박종민

아직 입춘이 먼데 실내의 난초는 그 꽃향기가 맑다.

다정(多情)한 여인의 일지춘심(一枝春心)은 그 난향(蘭香) 아래로 흘러, 넘치는 봄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어느 봄날 화담 선생이 문간에 기대 서서 봄꿈에 잠겼는데 홀연히 당대의 명기(名妓) 황진이가 말을 타고 지나간다.

잠시 잠깐 그녀를 불러 세워 ‘내 마음은 이미 미인 따라 떠나고 텅텅 빈 몸인채 문간에 기대섰다오.’ 하며 넌지시 마음을 건낸다.

황진이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탄 채로 멈추어 서서 댓구로 ‘나귀가 무겁다 무겁다 투덜거려 샀더니만 한 사람 넋이 덧 실려 있었구려.’하며 서로가 화려한 통성명을 주고 받은 사이가 되었다.



아직도 얼음처럼 찬 봄밤에 누리는 고독이 어찌 이리도 순연한 미감(美感)으로 차오르는지 무상(無想)의 기쁨은 무상의 슬픔으로 이어져 왈칵 울고 싶어질 때가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어떤 진채(眞彩)가 빚어내는 채색화 보다는 극도로 생략된 서너번의 필세로 완성된 난초, 무채색이 시사하는 담채화에 마음이 끌리고 있음은 나도 모를 일이다.

정(情)은 말 하지 않는 것. 설명 없이도 속뜻은 전해지는 것. 하지만 차라리 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잡목을 감아 올라간 마른 덩굴을 봐도 삶의 애증(愛憎)은 인간살이나 식물의 한살이나 어디서나 마찬가지이다.

사람 삶이 정(情)으로 하여 아침은 해가 뜨고 낮은 그렇게 분주하고 밤은 또 그렇게 기다림으로 저문다.

바다 밑 같은 적막, 고요 같기도 하고 무정(無情) 같기도 한 이 봄밤의 무게. 어디선가 고요를 흔드는 소리, 고요는 넘쳐흘러 어찌 이리도 무심한 지경인가.

이 허허한 미감, 도시의 한 가운데서 더욱 순연해 지는 관조(觀照)의 향수(享受)로 하루를 채운다.



정(情)은 사람과 사람을 묶는 천형(天刑)이라 했지만, 차가운 봄밤 뜨거운 여인의 입김을 뿌리칠 수 있는 남성은 과연 몇이나 될까.

오늘 같은 이른 봄밤엔 화담선생과 황진이와의 만남을 떠올리기에 좋다.

이른 봄밤, 아직도 매화가 피기에도 이른 봄밤, 진이는 일부러 찬비를 맞아 흠뻑 젖은 몸으로 화담 선생을 찾는다.

서경덕의 인품과 학식이 나날이 유명해지자 황진이는 화담(花潭)선생을 주목한다. 천하의 황진이가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었기로 그를 시험하려고 나선 것이다.

찬비에 젖은 몸이건만 뜨거운 시심(詩心)을 지닌 진이의 입김을 피해가기란 서화담에겐 태산을 넘기보다 더 힘든 상대였다. 서화담은 스무 몇 살이나 어린 진이의 젖은 몸을 달래듯 닦아주고는 처연히 그 옆에서 책을 읽는다.

그는 그의 집 문간에서 처음 마주칠 때부터 그녀의 내뱉는 호흡에 뇌쇄되어 숨이 넘어갔지만 사제지간의 경계를 결코 넘지 않기로 결심한 군자였다.

주기파(主氣派)의 기(氣)를 강조한 화담 선생과, 이(理)를 강조한 회재 선생은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이루어 서경덕은 율곡 이이에게, 이언적은 퇴계 이황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진이는 처음엔 화담 선생을 시험하려 했건만 오히려 화담의 태산교악 같은 인품 앞에 처음으로 남성으로서, 스승으로서 그를 흠모하기에 이르렀다.
 

▲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많은 날 스쳐 지나가면 뭘 하는가.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태산 같은 화담의 숨소리에 안겨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진이였다.

황진이는 스스로 서화담과 박연폭포와 함께 자신을 송도삼절이라 했다.

화담 선생은 그 누구에게도 꿈쩍하지 않는 태산이었다.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