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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다가가는 남성열전]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다

80. 박문수(朴文秀·1691~1756)

2013-02-05     이재명 기자
▲ 삽화=화가 박종민

봄이 오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해마다 봄이 온다는 사실이 얼마나 벅찬 감동인 줄을 몰랐다. 내게도 봄이 온다는 사실이 얼마나 눈물겹도록 고맙고 또한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은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눈밭에서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와 어린 쑥이 연한 잎을 내밀고 있다.

햇보리가 날 때까지 쑥은 우리들의 식탁에 반가운 식품이었다. 보리고개를 함께 넘어온 구황식품이 쑥만한게 없었다.



서럽다 서럽다 해도 배고픔이 제일 큰 설움이다. 영조대왕 때 함경도의 흉년을, 남쪽 땅에서 난 곡물이 북쪽의 땅 백성들을 살려낸 이야기가 있다.

보리고개를 넘지 못하여 굶어 죽어가는 함경도 백성을 살려내야만 했을 때. 영호남의 곡물 1만섬이 함경도로 보내져서, 대동강에서 배로 운반하여 성천에 이르면 거기서 북도까지 4, 5일 걸려 옮겼다. 그런 다음 북도의 백성들이 스스로 옮겨서 그들이 살아난 역사의 기록이 있다.



박문수는 영조대왕의 특명을 받고 오랫 동안 암행을 다니며 지방의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해결해 주는 민의(民意)의 대변자였다.

민의를 존중하고 민중의 기강을 바로잡은 박문수의 인간적인 면을 임금은 알고 있었기에 그의 청을 받아들여 흉년이 든 함경도 백성을 살려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는 백성의 배고픈 사정을 임금께 늘 호소하는 어사였다.



함흥의 만세교 옆에 세워진 북민비(北民碑)는 함경도 사람들이 박문수의 은혜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박문수는 함경도 백성의 영웅이었다. 빈민구제라면 박문수에게 맡기라는 말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연유가 거기에 있다.

함경도 규휼사업을 성공리에 완수한 공과를 인정받아 내직으로 돌아온 박문수는 병조판서직에 올랐다. 하지만 다시 황해도 절도사로 좌천되었다.

그는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내직에 들어왔다 하면 조정의 대신들로부터 배척당하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외직을 자청하기도 했다. 그는 차라리 암행어사로 나가 백성들의 고초를 눈으로 살피고 다니는 것이 훨씬 보람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조선시대 암행어사(暗行御使)의 대명사로 일컬어져 오고 있다.

민심(民心)을 알아야 천심(天心)이 보인다고 항상 임금에게 고하는 신하였다.

그는 지혜와 기지(奇智)가 뛰어나 영조임금의 신임을 받게 되어 억울한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고 지방 관리들의 수탈과 횡포를 보고만 있지 않았다.

박문수는 이처럼 암행어사 직책을 맡았을 때 곳곳을 떠돌며 억울하게 짓밟히는 민권을 옹호하고 구제하였고, 숱한 업적을 남겼다.



탕평인사를 추구하는 새정부를 보면서 새롭게 그를 주목한다. 역사 속의 인간 박문수의 생생한 삶, 역동적인 인생을 거울로 삼아 역사를 되짚어 본다.

년 전에 천안에 뿌리를 내린 박문수 후손들이 그의 삶을 추적해 보는 특별전에서 박문수의 초상화를 선보였다.
 

▲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


당상관인 그의 면모는 푸른 대나무와 같았다.

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다.



아직 겨울 속이지만 봄이 창밖에까지 와서 기웃댄다. 나는 아직 봄이 오는 들판에 내려설 여유도 없이 붓방아를 찧고 책상머리에 앉았다. 시 한 소절로 국밥 한 그릇의 값도 채우지 못한 채 서글픈 시인으로 앉아 있다.

한분옥 수필가·울산예총 회장